"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 핀란드에 대한 수식어는 '핀란드'라는 나라 이름보다 더 많이 회자된다. 유엔 산하 기구 행복도 조사에서 핀란드는 올해 또 137개국 중 1위를 기록했다. 6년 연속 1위를 지켰다.
핀란드인들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핀란드 관광청인 '비짓핀란드'가 최근 외국인을 대상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한 강의까지 개설했을 정도다.
그런 핀란드 한가운데에 "가장 불행하다"고 외치는 도시가 있다. 수도 헬싱키에서 600㎞ 이상 떨어진, 핀란드 중앙에 위치한 푸올란카다. 이곳의 별명은 '비관주의 마을'. 스스로 붙였다. 인구 2,500명의 작은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일보가 푸올란카를 찾아 사연을 들어봤다.
한국일보는 지난달 25일 인근 공항인 카야니공항에서 차량을 이용해 푸올란카로 향했다. 거리는 약 110㎞. 스산한 풍경이 내내 이어졌다. 보이는 건 둘뿐. 4월 말임에도 영하의 기온 탓에 여전히 수북하게 쌓여 있는 눈, 그리고 침엽수가 빼곡히 들어찬 숲.
푸올란카로 가는 차량은 드물었고 이렇다 할 건물도, 사람도 없었다. 이따금 "순록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푸올란카에 다다르자 커다란 노란색 표지판이 서 있었다. 보통의 도시들이 진입로에 써 두는 "환영합니다" 같은 인사가 아니었다. "당신에겐 되돌아갈 시간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풀어 해석하면, "푸올란카에 굳이 왜 왔느냐"는 뜻이었다.
당혹스러운 문구를 뒤로 하고 가장 유동인구가 많다는 시청 인근으로 향했다. 그러나 지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나마 다수는 고령층이었다. 슈퍼마켓 앞에서 만난 중년 여성은 "푸올란카엔 주로 노인들이 살기 때문에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주변은 온통 숲이고, 노인 인구가 많은 도시. '비관주의 마을'이라는 별명은 여기서 시작했다.
한때는 번성의 기운이 있었다. 도시가 자리 잡은 1900년엔 5,000명 정도가 거주했고 1969년에는 약 7,500명까지 인구가 증가했다. 그러나 산업화·도시화가 급진전되면서 인구 유출이 극심해졌다. 주로 청년들이 더 나은 교육과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떠났다. 푸올란카의 주된 산업은 임업이었는데, 청년들은 여기에 종사하길 원치 않았다. 젊은 여성들의 인구 유출은 더 심했다.
인구 유입 요인은 거의 없었다. 관광 인구조차 많지 않았다. 스키장이 있긴 하지만 핀란드 북부 지역 스키장이 워낙 유명해 푸올란카는 뒷전으로 밀렸다. 푸올란카에서 여행 사업을 하는 A씨도 "푸올란카 관광객 대부분은 다른 도시로 가던 중에 들르는 것"이라고 했다. 마을은 계속 쪼그라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핀란드 최대 유력 신문 '헬싱키 사노맛'이 푸올란카에 대한 특집 기사를 냈다. 주민들은 보도 시점을 2000년 초로 기억하고 있다. 기사는 "인구가 급격히 쪼그라들고 있으며, 도시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목도 "누가 푸올란카의 (마지막) 불을 끌 것인가"였다.
이를 기점으로 '푸올란카=불행한 도시'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인구 감소뿐만 아니라 고령화, 질병, 실업 등 부정적 기사마다 푸올란카가 사례로 등장했다. 푸올란카를 '죽어가는 도시'라고 부르는 이들도 늘어났다.
도시의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았다. 타개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민 중 누군가 이런 제안을 했다. "'불행한 도시'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자, 확실하게 인정하고 이를 홍보에 활용하자." '비극적 현실을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취지였다.
2006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비관주의 협회'를 결성했다. '행복한 국가' 핀란드에서 '불행한 도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역설적 작명 덕에 도시는 빠르게 유명해졌다. 그러나 '도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강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반대하는 주민이 많아지며 협회 활동도 흐지부지됐다.
비관주의 마을 콘셉트가 부활한 건 2017년. 푸올란카 시의회가 지역 관광 활성화 전략을 짜면서 과거의 아이디어를 재활용해 보자고 결정하면서다. 시의회는 비디오 감독 토미 라잘라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겼다. 라잘라는 푸올란카 출신이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교육을 위해 대도시로 떠났다가 잠시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라잘라가 내놓은 홍보 영상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2분짜리 영상에는 도시의 아름다움도, 그 속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푸올란카의 실제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숲, 아무도 놀지 않는 놀이터가 배경이 됐다. 라잘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등장해 "푸올란카로 오세요"라고 읊조린다.
도무지 '홍보 영상'이라고 볼 수 없는 이 영상은 '대박'이 났다. 과장이라고는 하나 없는 현실적인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데 대해 대중들은 "재밌다"고 호응했다. 라잘라는 "일주일 만에 몇만 명이 영상을 봤다"며 "그때 '이 콘셉트가 먹히는구나'라고 직감했다"고 말했다.
라잘라는 비관주의 협회를 재가동했다. 푸올란카 출신 등 40여 명이 참여했다. 협회 이사진인 오스카리 하팔라이넨은 "푸올란카에는 일거리나 놀거리가 없어서 특히 청년들에겐 굳이 살 이유를 찾기 어려운 곳"이라며 "협회엔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다"고 했다.
비관주의 협회는 2019년 불행과 비관 등을 주제로 한 공연을 올렸다. 비관주의 마을 콘셉트를 관광 상품화한 것이다. 라잘라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3,000명 정도가 찾았다"고 했다.
이때의 성공을 기반으로 매년 7월마다 공연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비관주의 마을의 '여름 축제'로 자리 잡았다. 협회는 마을 초입의 건물을 공연장 용도로 매입했고 그 앞에 '비관주의'라는 문구를 붙여 뒀다. 해당 건물에서 관광객들은 주류와 음식을 즐기고, 불행과 연관된 그림, 글귀가 담긴 기념품도 살 수 있다.
시 정부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민간 영역에서 일으킨 '붐'을 이어가려면 '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봤다. 비관주의 협회가 공연을 하는 시즌에 이들에게 주류 판매권을 예외적으로 허가하며 지원했다. 외부에서 오는 출연자들이 푸올란카에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숙소 마련에도 힘을 보탰다. 해리 펠톨라 푸올란카 시장은 "그렇게 많은 것을 지원하지는 않는다"고 웃으며 "다만 지원을 할 땐 협회 활동에 관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하자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도시가 북적대자 주민들도 들떴다. 펠톨라 시장은 "주민 10명 중 8, 9명은 비관주의 협회 활동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푸올란카 주민들에게 비관주의 마을이라는 작명과 이에 기반한 축제는 단순히 도시에 돈을 벌어다 주는 '관광 상품'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마을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주민'으로 남을 뻔했던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주민 아누 카이누라이넨은 "죽어가는 마을로 불리는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 빠지는 일이었겠는가"라며 "우리가 나서서 '비관주의 마을'이라고 부르니 유쾌하지 못한 현실을 유머로 승화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인구 감소, 노령화, 질병, 실업 등 푸올란카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2020년 기준 푸올란카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은 37.4%로, 핀란드 다른 지역(20%대)보다 고령층 비율이 높다. 펠톨라 시장은 "유아를 포함한 미성년자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라고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아 학교가 호텔로 개조됐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달라진 건 7월 한 달이나마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도시를 보며 '도시가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도시를 개발하고 주민들의 삶을 돌보는 과정에서 활기가 생겼다. 펠톨라 시장은 "스키장 등 관광 상품을 적극 정비하는 것이 도시 활력에 선순환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외부에서도 비슷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지난해 푸올란카에 장기간 체류하며 주민 생활 등을 심층 연구한 핀란드 알토대 연구진은 "'가장 비관적인 마을'이라고 자신을 비꼬는 것으로 도시 브랜드를 구축한 푸올란카에서는 기업과 주민을 위한 인프라가 꾸준히 개발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관주의 협회가 '주민들의 삶의 변화', '도시의 부흥' 등을 목표로 자신들의 활동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변화를 만들어낸 데 대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하팔라이넨은 "우리는 도시를 살리기 위해 뭉친 영웅이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핀란드인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불행한 현실'을 말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많은 이들에게 '불행도 삶의 일부이며,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 준 듯하다"고 말했다.
협회는 자신들의 활동이 다른 도시에서도 유의미하다고 여겼다. 푸올란카가 겪는 지방소멸, 고령화 등의 문제가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이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팔라이넨은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례를 통해 '현실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구나'라는 점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라잘라는 "그래도 우리가 성공했다고 보는지 '우리도 죽어갑니다'라고 호소하는 도시들이 많아졌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