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당 선전은 정치적 지진이다. 선거를 폭풍처럼 몰아갔고 마침내 승리했다.”
태국 총선 결과를 놓고 정치학자 티티난 퐁수디락 방콕 쭐랑롱꼰대 교수는 15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이렇게 말했다. 급진적 진보 정당인 전진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태국 정치사를 새로 썼다는 의미다.
쿠데타 군부정권의 무능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은 14일 치러진 총선에서 변화를 택했다. 하원 500석 중 과반이 야권에 돌아갔다. 그러나 군정을 곧바로 몰아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야권에 몰아준 건 아니어서 정권을 탈환하려는 야권과 어떻게든 사수하려는 군부가 정면충돌하게 됐다.
15일 태국 방콕포스트 등에 따르면, 반군부를 표방한 전진당(151석)과 푸어타이당(141석)이 292석을 얻었다. 친군부 계열인 팔랑쁘라차랏당(40)과 루엄타이쌍찻당(36석)은 77석을 지키는 데 그쳤다. 군정 수반인 쁘라윳 짠오차 현 총리가 이끄는 루엄타이쌍찻당의 성적은 특히 저조했다. 중도 성향 품차이타이당은 71석을 확보했다.
야권 맹주 푸어타이당을 꺾고 제1당이 된 전진당의 저력은 개혁 공약에서 나왔다. 태국의 금기인 군주제 개혁을 비롯해 징병제 폐지, 동성결혼 합법화 등을 약속해 전체 유권자의 42%를 차지하는 41세 이하 유권자를 사로잡았다.
돌풍을 이끈 건 피타 림짜른랏(42) 대표다. 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국립탐마삿대에서 금융학을 전공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공정책 석사를,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수료한 뒤 동남아시아 모빌리티 플랫폼 ‘그랩’ 태국지사 임원을 지냈다. 2019년 전진당 전신인 퓨처포워드당에 입당하며 정치를 시작한 지 약 4년 만에 총리직을 눈앞에 뒀다. 스펙, 소통 능력, 태국 유권자들이 중시하는 외모를 갖춘 그는 선거판의 스타였다.
피타 대표가 곧바로 총리직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원내각제인 태국에선 상원의원(250명)과 하원의원(500명) 중 과반(376명)이 찬성해야 총리에 취임할 수 있다. 상원의원 250명을 전부 군부가 임명해 하원의원 376명의 지지가 필요하다. 전진당이 확보한 151석에 최소 225석을 추가해야 한다는 얘기다.
피타 대표는 “푸어타이당과 조만간 연립정부 구성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두 당을 합해도 84석이 모자라는 만큼, 중도 성향 품차이타이당(71석)까지 연대해야 한다. 다만 군부와 연정을 구성한 품차이타이당이 변심할지는 미지수다. 현 정부에서 부총리 겸 보건장관을 맡은 아누틴 찬위라꾼 품차이타이당 대표는 전진당의 왕실모독죄 폐지 공약에 부정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래도 13석이 더 필요하다. 총선에서 의석을 얻은 19개 정당 중 타이쌍타이(6석), 타이민주당(2석) 등 중도·개혁 성향의 군소 정당들을 포섭해야 한다는 뜻으로, 연정 구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줄다리기와 이합집산이 불가피하다.
군부 반격도 관건이다. 영국 BBC방송은 “전례를 볼 때 군부가 전진당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2019년 총선에서 퓨처포워드당이 선전하자 군부가 장악한 헌법재판소는 “불법 자금을 조달했다”며 당 해산을 결정했다.
여권은 이번 총선 과정에서 “피타 대표가 미디어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며 “미디어 기업 소유주나 주주의 공직 출마를 금지한 법에 따라 출마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군부가 또다시 법적 수단을 동원해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