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만난 지 3년 된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그 사람과의 교제를 반대합니다. 남자친구가 사무직으로 근무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직장을 중소기업 영업직으로 옮기고 난 후부터 차갑게 변했습니다. 능력이 없다는 게 이유였죠.
남자친구와 다툴 때마다 속상한 마음에 엄마에게 털어놨던 것이 화근이었을까요.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했던 때 남자친구와 다툼이 잦아지면서 엄마의 반대도 심해졌습니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았던 엄마와 저는 당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걸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어요. 남자친구에게 외부 만남의 빈도를 줄여줬으면 좋겠다는 요구를 했지만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저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사람들을 만났죠. 배신감에 먼저 헤어지자고 했지만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다시 만났습니다.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는 걸 알게 된 엄마는 "차라리 내가 죽겠다"며 겁박을 하셨어요. 그날 엄마와 밤새 싸웠고 상황은 다음 날 엄마가 연락두절되면서 일단락됐습니다.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위치추적까지 해서 겨우 만난 엄마에게 "남자친구와 절대 결혼은 하지 않겠다", "다른 남자도 만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남을 허락받았지만 빈도는 늘었어요. 그러다 남자친구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그가 불특정 다수 여자들에게 '좋아요'와 댓글을 남겨 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걸 보면서 바람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저는 그에게 여자 지인들과의 약속을 잡지 말고 남자친구들과의 여행도 가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긴 싸움 끝에 남자친구가 제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관계가 회복됐습니다. 그러다 남자친구가 여자 지인과 약속을 잡은 걸 알게 됐고 다시 싸우게 됐어요. 일련의 과정을 알고 있었던 엄마가 또다시 저에게 남자친구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고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엄마와 관계가 원래 나빴던 건 아니에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로 저는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 댁에서 컸습니다. 아버지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잦은 외도로 엄마를 힘들게 하는 분이었지만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어요. 엄마는 혼자 따로 살며 제 학비를 지원해주고, 정신적으로 돌봐주셨죠. 고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이 이혼을 하면서 저는 엄마와 함께 살게 됐고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공유해왔습니다.
최근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저를 보고 엄마가 식칼을 가져와 "이걸로 나를 죽이고 만나라"고 하셨어요. 실랑이 과정에서 칼에 손을 찔린 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내 인생인데 왜 좌지우지하려고 하느냐"며 소리를 질렀죠. 돌아온 건 폭력이었어요. 성인이 돼 이렇게 심하게 맞아본 게 처음이어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입니다.
결국 제가 남자친구와 헤어져야 엄마와의 갈등이 끝날까요. 제 옆을 수년 동안 지켜줬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럴수록 남자친구와 잘 지내고 싶은데 마음과 달리 더 집착하고 의심하는 제 자신을 보면 암담합니다. 엄마를 떠올릴 때면 마음은 더 무겁습니다. 엄마가 저와 남자친구 교제를 반대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건강까지 나빠지고 있어요.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제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알려주세요.
박정아(가명·29·회사원)
정아씨,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성숙해가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엄마와 큰 갈등을 빚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요. 언제든 내 편이어야 할 부모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반대하고, 나를 지지하지 않을 때 얼마나 괴로울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아씨는 남자친구와 엄마 사이에서 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수밖에 없을까, 정아씨 엄마는 남자친구에게 왜 그랬을까, 그 감정을 붙잡고 들어가 천천히 이해해봅시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고 연인을 공격할 때 정아씨는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정아씨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엄마가 남자친구가 아닌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느꼈을 겁니다. 마음의 원망이 크게 쌓여 있을 거예요.
엄마는 정아씨가 느끼는 그대로, 충동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에요. 엄마 자신의 감정을 자녀보다 우선에 두고 충동적이고 공격적으로 행동합니다. 성인이 된 정아씨가 가장 원하는 건 연인이 옆에 있어주는 걸 겁니다. 하지만 엄마는 딸을 독점하고 싶어 하죠. 정아씨가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능했지만 이후부턴 이런 독점적인 관계는 어려워집니다. 정아씨를 사랑해서, 위하기 때문에 교제를 반대한다고는 하지만 이는 엄마의 위치에서 자식에게 보여야 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딸이 떠나는 데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정아씨의 남자친구에게 강하게 투사하는 것이죠. 엄마가 무의식적으로 진짜 거부하는 것은 남자친구가 아니라 정아씨의 독립일 거예요. 그런 관계에 정아씨도 일부 길들여져 있는 건 아닐지 돌아봐야 할 시점이 됐어요.
부모와 성인이 된 자녀의 관계가 건강하게 만들어지려면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바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연으로 잠작해보건대 정아씨의 부모님은 이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어요. 잦은 외도로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살아 정서적인 교류가 없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다소 방치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정아씨는 온통 좋은 기억만 이야기합니다.
정아씨의 엄마는 성인이 된 정아씨를 통제하려고 해요. 자신의 불안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자식을 끌어가는 식으로 불안을 낮추는 것이죠. 때로는 협박을 하면서까지 초지일관 통제를 하려고 하는데 정아씨는 이런 통제조차 관심과 애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런 부모 슬하에서 자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부모가 원하는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고 제대로 날개를 펴지 못합니다. 대인관계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상대를 통제하면서 역시 이를 애정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정아씨가 남자친구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중요한 건 현재 정아씨의 상태입니다. 어머니의 일방적인 통제에 익숙해진 결과로 정아씨의 마음엔 현재 죄책감이 가득한 것 같아요.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걸 넘어 스스로 부모님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사랑을 계속 되뇌이려고 하죠. 그 이면엔 분노와 서운함, 적개심이 있을 겁니다. 부모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충분히 느껴도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정아씨가 주체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엄마와 남자친구 중 어느 쪽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진정한 독립을 위해선 내 마음을 잘 알아차려야 하고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든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우선입니다. 불안정하고 의존적인 성향의 엄마와 그 관계에 익숙해진 정아씨가 상호 간에 독립하려면, 정아씨가 먼저 진정한 독립을 이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독립이란 뭘까요. 몰두하는 대상이 바뀌는 겁니다. 쉽게 말해 엄마의 감정, 행동보다 자기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결정이든 내 감정과 의지로 결정을 하는 겁니다. 엄마의 간섭에 대해서는 "내가 성인이니 내가 선택하고 배워갈게요. 연인 관계에 대해 의논해서 결정할 상대는 엄마가 아니라 남자친구예요"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일종의 '선 긋기'인데, 엄마와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죠. 엄마와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지내기 위해서는 어렵더라도 지금 선을 그어야 합니다.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엄마 외에 한 명 더 생길 걸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남자친구를 통제하게 되죠. 지금 느끼는 불안감은 정아씨의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세요. 그런 성향의 자기 자신을,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상대에게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인정받는 경험은 좋은 자극이 될 거예요. 그래야 통제 행동도 줄어들게 됩니다.
남자친구에게 의존하고 집착하는 문제가 반복된다면 내 마음에 집중하며 버티는 연습을 해보세요. 남자친구에게 거리를 둘 때 느껴지는 빈자리를 자기의 감정과 마음으로 채우는 연습입니다. 혼자 있을 때 지지받는 관계가 없어진 느낌에 불안이 커져서 관계에 집착하게 되는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방법이에요. 쉽지 않겠지만 스스로 '거리 두기'에 대한 기준을 세워보고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이 쌓일 거예요. 성숙한 삶을 고민하는 당신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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