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19~21일 히로시마에서 주최하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법의 지배(rule of law)'와 '힘에 의한 현상 변경 반대'를 주제로 연설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법의 지배는 윤 대통령이 지난달 미국 국빈 방문 당시 상·하원과 하버드대를 찾아 강조한 내용이다. 윤 대통령은 올해 G7 정상회의에서 신설된 세션에 선도 발언자로 나서는데, 일본은 윤 대통령에게 특정 주제를 콕 집어 발언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11일 복수의 한일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번 G7 정상회담 확대회의에서 '법의 지배',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질서 유지'와 관련해 연설한다. "글로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윤 대통령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일본 정부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윤 대통령은 G7에서 새로 마련된 '평화·안보·번영' 세션을 주도하는 발언자로 나설 예정이다. 우크라이나와 인도·태평양 지역의 무력충돌과 군사적 긴장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자리다.
일본이 윤 대통령에게 법의 지배라는 주제로 연설을 요청한 것은 최근 급속히 진전된 한일관계가 영향을 미쳤다. 국제안보 이슈를 다룰 양국 협력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양국 외교 소식통은 "윤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연설은 많은 국가들의 주목을 받았다"며 "일본을 비롯한 주요 인도·태평양 관여국가들이 윤석열 정부의 '자유와 법치에 근거한 글로벌 중추국가(GPS)'와 관련한 협력사업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국가들의 연대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힘에 의한 현상 변경 반대'라는 주제는 윤 대통령의 발언 수위를 조절하기 껄끄러울 수 있다. 자칫 대만해협 문제를 놓고 또다시 중국을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겁박할 때마다 이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해왔다. 정부는 올 하반기 한중일 정상회의를 주최할 계획이라 중국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이에 윤 대통령이 관련 발언을 절제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정부 소식통은 "윤석열 정부의 GPS 구상은 특정 국가를 배제하거나 겨냥하지 않는다"며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국가들과 연대해 국제위기를 극복해 나가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라고 말했다. 다만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인도·태평양에서 그 어떤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도 강력히 반대한다"는 구절이 포함된 만큼 윤 대통령이 G7 정상회의에서 어떤 식으로든 강조할 여지는 남아있다.
일본 정부는 G7 회원국뿐만 아니라 한국, 호주, 인도를 비롯한 초청국을 상대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집단적 결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이번 평화·안보·번영 세션을 추진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날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법의 지배에 근거해 자유롭고 열린 국제질서에 대한 지지를 확산해 나가겠다"며 평화와 안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