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은 101번째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은 많은 어린이가 장난감을 손에 쥐거나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에 혹은 키즈카페에 간다. 하다못해 치킨 한 마리,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먹는 날이다. 누군가는 "매일이 어린이날인데 무슨 또 어린이날이야?" 하며 불편함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 한국 사회는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라"는 말이 더는 낯설지 않거니와, 어린이를 둔 많은 가정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간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는 부모와 조부모, 친척과 지인까지 한 아이를 위해 지갑을 여는 '텐 포켓' 세대라 불리며 여러 산업과 명품 시장까지 변화시켰고, 아이의 학교와 학원 일정은 물론 취미나 운동, 관심사에 따라 부모의 주말과 휴가 계획을 짜는 시대가 되었다.
"이번 어린이날은 아무리 비행기 푯값이 비싸도 해외에서 보낼 거야." 얼마 전 비행기 표를 알아보는 친구의 말엔 비장함마저 돌았다. "아이네 반에서 비행기 안 타 본 애가 우리 애밖에 없대." 아이는 유치원에서 돌아와 엄마에게 자신만 비행기를 못 타 봤다며, "엄마, 우리 집 비행기 못 탈 정도로 가난해?"라며 물었다고 했다. 엄마는 '가난'이란 단어를 쓰며 울먹이는 아이를 보니 죄책감이 몰려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자기 피로만 가중될 것이라는 이유로 미뤄 왔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을 낀 연휴가 지나면 아이들은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린이날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그저 행복했던 자신의 시간을 뽐내고 싶은 귀여운 자랑의 말들이다. 아이의 친구들은 비행기를 탔거나 유명 놀이공원에 다녀왔다고 뽐내겠지. 아이들의 귀여운 으스댐. 이 귀여운 으스댐은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어른의 세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쟁이 된다. 어린이날 한 달 전부터 어른들은 장난감을 고르고 여행지를 검색하고 예약하니까.
물론 이 경쟁은 어린이날이 끝나도 어김없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경쟁은 약 20년간 학원과 학교에서의 성적, 친구 관계는 물론 부모의 집, 자동차, 직업과 학용품, 옷과 신발, 장난감을 넘어 여가를 보내는 일까지 이어진다. 학업을 마치고 성인이 되어서도 직업, 직장, 연봉, 집, 자동차, 외모, 휴가지 등 또 다른 경쟁이 시작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의 성적과 성격, 활동 등이 부모의 경쟁 도구가 되니까. 이렇게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경쟁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선 당연할까.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존 쿠체가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세계가 원래부터 서로 경쟁하는 경제주체들로 갈라지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경쟁적 경제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라고.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선택할 수 있고, 경쟁을 선택했기에 경쟁하는 것일까. 경쟁이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라면, 우리가 아이들을 경쟁터 아니 전쟁터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이 해방선언의 "어린이를 교실이 아닌 자연으로 해방하라" 이전에 "어른을 전쟁터가 아닌 자연으로 해방하라"라는 어른 해방선언이 먼저 이뤄져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