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74) 영국 국왕의 6일(현지시간) 대관식이 희망과 기대, 축복으로만 채워지는 건 아니다. 제국주의의 유산인 '영국연방'(영연방)으로 묶인 오세아니아·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이참에 식민시절 피해를 청산하겠다며 한꺼번에 나섰기 때문이다. 공식 즉위를 앞둔 찰스 3세로선 영국이 지배자로 군림하며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던 과거에 대한 무거운 책임 앞에 서게 된 셈이다.
이 같은 움직임을 주도하는 건 영연방의 핵심국 중 하나인 호주다. 게다가 호주는 원주민 이슈를 넘어, 공화제 전환까지 고려하고 있다. 벌써부터 찰스 3세의 근심을 깊게 만드는, 대관식에 드리워진 '그늘'이다.
4일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영연방 12개국 독립추진단체 대표들은 최근 찰스 3세에게 보낸 공개 서한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공식 사과와 함께, 영국 왕실의 부를 재분배하는 방식의 보상을 요구했다. 서한에는 식민 지배를 받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호주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등 오세아니아 3개국, △캐나다 △바하마 △자메이카 등 아메리카 9개국이 참여했다.
12개국 단체 대표들은 우선 "찰스 3세가 6일 원주민 대량학살, 식민지화의 끔찍한 영향과 (부정적) 유산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영연방 수반 회의'에서 영국 왕실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화를 할 때가 다가왔다"고 언급한 만큼, 대관식 현장에서도 찰스 3세가 이를 공식화하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원주민 억압·자원 약탈·문화 폄하 책임과 관련, 왕실의 부를 재분배하는 논의에 즉각 나서라"고도 요구했다. 또 "찰스 3세는 영국 내 박물관과 기관에 있는 원주민 유해와 보물 및 유물을 반환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한 작성을 주도한 호주 원주민 출신 노바 페리스 전 상원의원은 가디언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 주제가 왕실 입장에선 어려운 대화의 영역임을 잘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모든) 변화는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영연방 원주민들의 저항은 호주에서 가장 뚜렷하다. 원주민 지위 회복을 위한 개헌 절차가 진행되는 게 대표적이다. 현행 호주 헌법은 '영국이 주인 없는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논리하에 구성돼 있는데, 이를 '호주 대륙의 원래 주인은 원주민'이라는 취지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영국 왕실 중심의 입헌군주제에서 '왕이 없는 공화제'로, 아예 정치 체제 자체를 바꾸려는 움직임도 있다. 원주민만이 아니라 정치권도 동참하고 있다. 호주 원주민의 최대 정치 파트너는 노동당 출신의 '공화주의자' 앤서니 앨버니지 현 총리다. 그는 이번 개헌이 성공하면, 다음 총선에서 공화제 전환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울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최근에는 "앨버니지 총리가 찰스 3세 대관식에서 충성 서약을 해선 안 된다"는 주장마저 나온다. 원주민 기반 정당은 물론, 호주 시민단체 공화주의자운동(ARM)도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총리는 호주인보다 외국 왕을 우선시하는 불충하고 부정직한 서약을 거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호주 내 여론 악화에 찰스 3세도 움츠리는 모습이다. 젊은 시절 호주의 질롱그래머스쿨에서 유학을 해 이 나라에 대한 애정이 깊지만, 최근 호주 정부의 공식 방문 요청에 그는 "우리 (국왕) 부부가 호주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