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로 들어온 혐오의 책임

입력
2023.05.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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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근거지란 말 들어봤어?"

얼마 전 아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학교를 빠지지 않고 개근하는 학생은 가족 해외여행이나 단기 어학연수·체험학습 등을 못 가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로 취급받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교실 내 혐오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초등학교 4학년 딸이 혹시 학교에서 '가난한 아이'로 낙인찍히는 건 아닐까 솔직히 걱정도 됐다. 딸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입학한 이른바 '코로나 학번'이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뒤 우리 가족은 최근 3년간 한 번도 해외여행을 안(못) 갔다. 아내는 "꼭 이것 때문은 아니지만, 올여름 휴가 땐 가까운 동남아라도 가는 걸 고민해보자"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땐 개근상은 성실, 근면하고 몸도 건강해야 받을 수 있는 상이었다. 성적 우수상보다 개근상이 더 값지다는 덕담도 종종 나왔다. 그런데 이젠 '거지'란 말과 합쳐져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 됐다. 나는 몰랐지만 개근거지는 '신(新)조어'가 아니었다. 2019년 한창 회자가 됐었고, 코로나 기간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지며 자취를 감췄다가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며 재등장했다는 것이다.

'월(세)거지' '전(세)거지' '휴거(휴먼시아 거지)' '엘사(LH 사는 거지)'에 이어 이젠 개근거지라니. 씁쓸한 심정으로 검색을 해보니 극소수 학부모나 학생이 쓰는 표현을 언론이 재생산해 오히려 혐오 정서 확산을 부추겼단 비판도 적잖았다. "기자와 인터뷰에서 '개근거지란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 말했는데 쏙 빼놓고 보도했다"고 토로한 현직 교사도 있었다. 실제 주변 교사들에게 직접 물어보니 "학생들끼리 직접 그런 단어로 놀리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물론 교사가 모르는 혐오 표현을 아이들끼리 썼을 가능성은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또래 집단의 영향력은 커지는 반면 교사와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언론이 사회 현상을 조망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혐오와 차별의 정서가 어쩌다 교실에까지 퍼졌고, 이후에 어떻게 생산·유통되고 있는지 좀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내의 말을 듣고 며칠 뒤 팀 회의에서 썩 괜찮은 발젯거리라도 찾은 듯 후배들에게 "개근거지 현상을 토대로 교실 내 혐오에 대한 기획 기사를 써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불쑥 제안했던 행동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됐다.

현장 교사와 교육 연구자들이 함께 펴낸 '혐오, 교실에 들어오다'란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혐오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한 학기 동안 특정 중학교 2학년 1반 학생들을 관찰하며 심층면담을 진행했다. 실제 교실에서 혐오 발언, 표현이 어떻게 시작되고 행해지는지 과정이 생생히 담겼는데 한 저자의 진단이 인상적이었다.

"혐오 표현에 있어서 학교의 안과 밖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학교 밖 세상이 학교 안에 반영되기도 하고, 학교에서 혐오 표현을 배우기도 한다. 그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경향신문 인터뷰)

학교 안팎에 존재하는 혐오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 비단 교육의 사명만은 아닐 것이다.

윤태석 사건이슈팀장 sportic@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