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상경해 스물여섯에 죽은 '박자언'은 귀신이 되어 당산역을 배회한다. 악귀가 아닌데도 지옥도의 호법신 도명존자가 욕심을 내 잡아들이려 하자 관음보살이 나타나 꾸짖으며 명을 내린다. 한 해의 시간을 줄 테니 박자언을 극락왕생시키라는 것. 고3 시절로 환생한 자언의 눈에는 귀신이 보이기 시작하고 연민이 많은 그는 귀신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를 해결해 주려 애쓴다. ‘혹시 이게 극락왕생으로 가는 열쇠일까?’ 자언과 도명은 귀신과 인간을 돕는 일을 함께 하기로 의기투합하지만 이들의 여정이 순탄할 리가 없다.
총 3부로 기획된 고사리박사 작가의 '극락왕생'은 1부가 7권의 단행본으로 나왔고 2부가 웹툰으로 연재 중이다. 1부의 충격적인 결말을 접한 독자들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으리라. 과연 시험대에 든 자언은 윤회의 고통을 끊어내고 극락왕생할 수 있을까?
'극락왕생'은 불교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다. 비로자나의 진리를 설법하는 여러 보살과 호법신 들이 등장하고 무대 또한 인간도와 천상도, 지옥도와 아귀도를 넘나든다. 언뜻 종교적 색채가 강해 보이지만 불교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는 만화는 아니다. 그 이상으로 풍성하고 새로우며 독자적인 길을 간다. 자취가 지워졌던 한국 설화와 신화 속 여성들을 불러내 숨결을 불어넣고 상상을 더해 모계 중심의 여성 서사를 독창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나는 이 기골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인물들이 (무독귀왕 하나만 빼고) 전부 여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율했다. “나랑 비슷한 신이 어딘가에서 나를 도와주려 하고 살펴주려 하고 나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을 그림과 이야기로 선명하게 마주하는 순간, 우리에게 이런 작품이 너무나도 필요했다는 걸 깨달았다.
신화적 상상력의 이야기지만 인물들은 극히 현실적이다. 자언은 자기가 왜 죽었는지 몰라서 무섭고 불안하다. 일 중독자에 완벽주의자인 도명은 인정욕구에 시달린다. 최고 지혜를 가졌다는 문수보살은 자꾸 일을 그르치기만 한다. 보살들은 생각보다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며 인간들은 평범하다 못해 어딘가 부족하고 외롭다.
그런데 이 여자들이 뭘 하냐면, 손을 잡는다. 사는 게 영 혼란스럽고 내 맘 같지 않고 그래서 미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와중에도, 타인을 긍휼히 여기고 연민하며 손을 내민다. 끝내 끌어안는다. '극락왕생'은 서로를 돕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자언은 귀신이 슬퍼하는 모습이 가엾고 속상해서 그들을 돕는다. 이 세상 누구도, 귀신이라도 그런 슬픔을 느껴서는 안 된다면서. 또 자신을 실망시킨 문수에게 말한다. 당신은 엉망진창이고 나는 죽었다 살아난 반쪽짜리니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자언이 쏙닥나무 아래서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계속 살아보고 싶다”고 할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너무 많았던 젊은 여자들의 죽음이 떠올라서다. 자언도 그녀들도 더 살았으면 좋았을걸. 이제라도, 남은 이들이라도 계속 살아야지. 살게 해야지. 그러려면 우리는 손을 잡아야 한다. 엉망진창이라도, 아니 엉망진창이기에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