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용광로로 변신한 국립현대미술관…미술관을 바꾼 젊은 아이디어들

입력
2023.05.05 05:40
8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
'젊은 모색 2023' 열려



미술관은 시각적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에게는 지루하고 엄숙한 공간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처럼 오래전(1986년)에 세워진 곳이라면 분위기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1전시실과 2전시실을 잇는 중앙홀은 높은 천장과 길다란 복도로 위압적이다. 관람객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마저 주는 이 공간이 흥미진진한 모험을 떠나는 장소, 신화 속 무대로 변신했다. 입구에는 미술관의 수호신들이 영상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작품 ‘천왕문’이 서 있고 천왕문에서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는 불그스름한 철판으로 제작된 진입로 성격의 작품 ‘용광로’가 놓여 있다. 관람객은 천왕문과 용광로를 지나서 2층으로 통하는 Y자 형태의 계단을 오르면서 마침내 작품 속으로 뛰어든다.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계단 상부에 놓인 영상 작품 ‘제단’. 관람객이 작품들을 차례로 지나는 동안 3개의 센서가 움직임을 감지해 음악의 긴장감을 높인다. 제단 코앞까지 다가가면 영상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마침내 관람객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천왕문과 용광로, 제단은 ‘내 사랑, 난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 당신은 그저 다른 삶으로 넘어간 거였는데’라는 하나의 작업에 포함된 작품들이다. 이 작업은 건축과 퍼포먼스(행위예술)를 뒤섞은 독특한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여 온 2인조 그룹 ‘뭎’(조형준·손민선)이 제작했다. 관람객들이 평소에 이용하지 않아서 버려진 공간(Y자 계단)에 생동감을 불어넣은 작업이다. 지금 과천관 1·2전시실에는 이처럼 미술관의 개념을 확장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30·40대 작가들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이 과천관에서 9월 10일까지 열린다.



국내서 가장 오래된 신진 발굴 전시...건축과 디자인으로 영역 확장

젊은 모색은 1981년 ‘청년작가전’에 뿌리를 둔 국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신진 작가 발굴 전시 프로그램이다. 올해로 42주년을 맞이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스타로 자리 잡은 이불, 서도호, 최정화, 문경원 작가가 이 전시를 거치며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전시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것도 사실. 2021년까지 전시가 21차례나 열리면서 새로운 주제나 내용을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올해의 작가상’ ‘MMCA(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등이 제정되면서 ‘젊은 모색’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올해 젊은 모색은 프로그램이 ‘젊은 작가를 위한 무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방향 전환을 실험하는 무대로 꾸며졌다. 작가 선정 분야를 ‘건축’과 ‘디자인’으로 확장한 것. 두 분야는 큰 틀에서는 예술이지만 대중들에게 미술관에서 주로 소개하는 작품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비친다.

주제를 ‘미술관’으로 정한 것도 새로운 시도다. 미술관이라는 특정 공간을 주제로 정한 뒤 국립현대미술관 외부 전문가들에게 작가 추천을 의뢰했고 그 결과 최종 선발된 작가에는 건축가가 상당수 포함됐다. 13명 중에 7명이 건축가거나 건축에 기반한 예술 작업을 펼친다. 여기에 그래픽 디자이너와 가구 디자이너, 미디어 작가, 사진가 등도 선발됐다. 이들은 일찍부터 미술관에 작품을 선보였던 작가들이지만, 그럼에도 미술계에서는 새로운 얼굴들이란 것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명이다.



미술관과 건축·디자인 만남의 결과는


실제로 전시장에서는 회화나 조각에 기반한 작품들과는 시각적 언어가 다른 작품들이 선보였다. 언뜻 보면 건축전처럼 보이지만 도면이나 모형이 없다. 대신 건축과 디자인이 미술관을 만나면 ‘이런 작품이 탄생하는구나’를 알려주는 작품들이 놓였다. 예컨대 그래픽 디자이너로 디자인계에서 팬을 확보한 오혜진 작가는 미술관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소리와 영상으로 구현한 ‘찾아오시는 길’ 작품을 선보였다. 서울지하철 4호선 대공원역에서부터 걸어서 30분(1.6㎞)은 걸리는 길기로 소문난 과천관 진입로를 그래픽 디자인 작업들로 표현하고 이를 동시에 소리로 표현한 작품이다.

한편 상업 공간이나 사무 공간을 디자인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씨오엠(김세중·한주원)은 과천관을 가구 정도의 크기로 축소한 작품들을 내놨다. 도저히 한눈에 포착하기 어려운 거대한 시설을 손에 잡힐 듯 작은 놀이터처럼 공간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놀이 블록처럼 만들어진 작품들 사이를 거니는 경험도 색다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종이에 도면을 그리고 건물만 짓던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장치나 사물, 오브제 등으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던 이들”이라고 소개했다.




오늘날 미술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번 전시에서 가장 처음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인 이다미 작가의 ‘드랙 뮤지엄’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형태와 질감 속에 진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이 작가가 건축가로 일하면서 미술관, 박물관들의 현상설계에 출품했던 일종의 모형들을 새롭게 작업해 한데 모은 것이다. 예컨대 국립여성사박물관의 계단실을 위한 모형은 삶의 질곡을 드러내듯 표면이 고목처럼 층이 졌고, 서울공예박물관의 기둥을 위한 모형은 올록볼록한 형태가 특징이다. 미술관이라면 작품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마땅히 절제된 외관을 갖춰야 된다는 상식에 도전한 작품들이다.

이 작가는 소개글에서 “오늘날 뮤지엄 건축은 어떤 모습과 태도여야 할까? 비유하자면 어떤 옷을 입거나 어떤 몸이 되어야 할까? 이 질문이 제도화되지 못한 주변화된 이야기와 만날 때, 건축은 소수자 정체성과 집단성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자신의 작품이 시작됐다고 썼다.

전시장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공간을 쪼개고 나누고 이어 붙인다. 뭎의 작품처럼 관람하는 활동 자체가 즐거운 작품도 있지만 아무래도 상당수 작품은 회화보다는 관람에 진입 장벽이 있는 셈이다. 관람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건축가들보다 일반인들이 제 작품을 더 빨리 받아들이는 것 같다. 직관적으로 작품을 바라본다면 충분할 것이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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