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한반도 지형’ 찾아냈던 목사, 독자들이 열광하는 환경기자 되다

입력
2023.05.03 16:00
24면
시멘트업계·산림청 등을 겨냥한 기자 활동
1인 독립기자로 끈질기게 환경문제 고발
많은 제도개선 성과 내며 ‘리영희상’ 등 수상

1999년 12월 20일, 강원 영월 서강변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최병성 목사는 카메라를 챙겨들었다. 최 목사와 함께, 선암마을 주민 이종만씨는 낫을 들고 나섰다.

절벽을 타고 이동하면서 최 목사가 자리를 잡으면, 이씨가 낫으로 잡목을 쳐서 제거했다. 그렇게 왼쪽으로 왼쪽으로 가면서 서강을 찍었는데, 어느 순간 딱 어떤 풍경과 마주했다. “이건 ‘정말 우리나라 지도다’라고 생각했어요. 늘 잡목이 가려서 거기 주민들도 그 풍경을 본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간밤에 눈이 쌓여 있었다. 전날 절벽을 타느라 온몸이 쑤셨지만, 다시 그 자리로 가서 그 풍경을 찍었다. 이제 애국가 영상에도 나오는 ‘한반도 지형’(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5호)이 발견된 순간이다.

‘한반도 지형’은 서강에 영월군이 쓰레기매립장을 만들려던 걸 막기 위해 최 목사와 그곳 주민들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최병성 목사는 지난달 1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동강에 물이 돌아가는 지형이 유명하잖아요. (동강댐 건설을 막을 수 있게 했던) 그런 그림이 탐이 나서 ‘서강에도 물돌이 지형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종만이 형님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거죠.

그는 그 사진을 포함해 전시회를 열고, 기자들에게 알려 서강 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었다. 사회를 개선하고 여론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찾아내고 드러내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아는 것. 뛰어난 기자적 기질이다. 24년이 흘러 그는 이미 수백 개의 환경고발기사를 쏟아낸 시민기자가 됐고, 지난해 ‘리영희상’ ‘투명사회상’을 수상했다.

사비를 털어 전국의 산과 강, 바다를 누비고 수많은 학술 논문을 찾고, 직접 연구소에 실험을 맡겨서 시시비비를 가려 작성하는 그의 논문 같은 기사들은 인터넷에만 게재되지만 이미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서강 싸움에서 이겼지만, 동료를 잃었던 그때

그는 목사이지만 교회에서 활동하지는 않고, 사실상의 정체성은 ‘기자’라고 할 수 있다. 초록별생명평화연구소장인데, 1인 연구소이다. 방송사, 신문사 기자들이 무수히 전화해서 자문하는 ‘취재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서강 문제를 알리는 ‘취재원’ 신분이었다. “(서강 문제가) 맨 처음에 한겨레신문에 크게 나갔고, 그다음에 한국일보에 반페이지가 나갔죠. 이후에 방송들에 나가기 시작했고요. 한국일보에서 그때 박서강 기자(현 멀티미디어부장)가 취재를 왔었는데요. 그때 이름을 보고 ‘서강을 지킬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죠.”(웃음) 그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서강 문제가 알려져 결국 쓰레기매립장 건립 추진이 철회됐다.

그 과정에서 슬픔도 겪었다. 함께 ‘한반도 지형’을 발견했던 ‘종만이 형님’이 서강살리기 성과를 보기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7개리가 같이 싸웠는데 5개리가 떨어져 나갔어요. 종만이 형님이 자기 동창인 이장 한명을 설득하려고 했는데, 이야기를 하려면 술 한잔해야 이야기가 된대요. 술 한잔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오다가 미끄러져서 농로에 빠진 거예요. 3월 8일(2000년)이었어요. 날씨가 춥다 보니까, 동사를 한 거죠. 종만이형 덕분에 ‘한반도 지형’을 발견했으니까 그 발견지역을 ‘종만봉’이라고 제가 이름 붙였는데요. 영월군이 전혀···(공식이름으로 채택해주지 않더라고요). 자기들(영월군)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환경문제 알리는 활동하다, 직접 기사를 쓰다

‘취재원’이었다가 직접 기사를 쓰게 된 계기를 물었다. “혹시 너무 답답하셨나요? ‘왜 이런 건 안 써줄까’하고요.” 그는 “그런 건 아니었어요”라고 답했다.

2006년 ‘쓰레기 시멘트’ 문제를 미디어다음 블로그에 쓴 것이 첫 기사였다. 시멘트 문제는 서강에 살던 시절에 가졌던 문제의식이다. “수도원을 하고 싶어서 그곳에 갔는데, 그게 인생을 바꾼 거죠. 서강 싸움을 했고, 시멘트 문제는 인식을 계속하고 있었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시멘트 공장에서) 냄새가 날아오는 거예요. 산 너머 마을 입구 쪽에 공장이 있었어요.”

시멘트 문제도 취재원으로서 기자들에게 알렸다. “맨 처음 한겨레신문이 시멘트를 한 번 써줬고요. 당시에 미디어다음에 취재파트가 있었는데, 그 친구(기자)가 와서 두 번 썼어요. 그런데 대통령 선거 앞두고 취재파트가 없어진 거예요. 민감하니까. 그 친구가 ‘목사님이 직접 쓰시면 어때요’ 하는 거예요. 바로 그거였어요.” 그렇게 혼자 일하는 독립기자가 됐다. “미디어다음 블로그에 썼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된 뒤, 다음의 사회블로그를 많이 약화시켜 버려서요. 그 이후로 오마이뉴스에 쓰고 있지요.”

기사의 질을 인정받으면서 2020년부터 ‘최병성 리포트’ 코너로 운영되고 있고, 기사가 날 때마다 네이버와 다음포털의 뉴스분야 메인화면에 걸린다. 그만큼 팬(독자)을 확보하고 있다.

그가 쓴 기사들은 많은 성과로 이어졌다. 2020년 라돈 방사능을 포함한 인산석고를 삼표시멘트가 경남 진해에서 강원 삼척으로 들여와, 돈을 받고 처리하고 시멘트에 섞으려는 것을 고발해 철회시켰다. 2021년 쌍용양회가 서강 폐광산 지역에 산업폐기물매립장을 추진했는데 그곳이 비가 내리면 며칠 만에 오염수가 새나간다는 걸 드론으로 찍어 증명해서 건립을 막았다. 2021년 산림청이 ‘30년 넘은 나무는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며 대대적인 벌목을 추진했던 것에 대해, 현장 조사와 각종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허위임을 밝혀서 벌목 추진을 중단시켰다. 또 시멘트 업계가 쓰레기 처리비를 벌기 위해 일본에서 석탄재를 들여와 처리하는 실태를 고발해, 일본산 석탄재 수입을 금지시켰다. 요즘은 산림청이 산불에 취약한 소나무로 조림을 하는 문제, 소나무 재선충을 예방하기 위해 농약을 주입하면서 발생하는 유해성 문제 등을 파고드는 기사 등을 게재하고 있다.

그에게 “산림청은 왜 그렇게 나무를 베려고 하나” 물었더니, “연결된 기관들이 많아요. 거기 먹거리를 만들어주려는 거죠. 산림청장 그만두면 치산기술협회장으로 가거든요”라고 답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먼저 기사 쓰셔도 괜찮아요”라고 했다.

기성 언론사는 ‘특종 욕심’에 다른 언론사와 기사를 공유하는 것을 꺼려하지만, 그는 반대다. 문제 개선을 위해 언론이 협업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보도자료를 썼어요. 시멘트 문제 등 공동으로 해야 할 것이 있으면 환경부 출입기자들에게 기사 쓰기 전에, 보도자료를 보냈죠. 내 기사가 먼저 나가면 다른 기자들이 안 쓰니까요. 다른 기사들이 나간 다음에 내 기사는 따로 나가도 돼요. 지금도 그래요. 공동취재하면 ‘먼저 쓰세요’ 해요. 저는 분량과 내용 자체가 많으니까요. 다른 기사가 먼저 나가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많아요.”


고정 수입 보장 안 되지만 1인 독립기자가 좋다

월급을 받는 제도권 언론사에 소속되면 훨씬 생활이 안정적이겠지만, 그는 “저에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주간지에서 요청을 받고 영양 풍력 문제를 한 번 썼었어요. 그때 3페이지를 실었는데도 쓰고 싶은 말을 다 못 썼지요. 인터넷에 쓰면 같은 주제를 가지고 계속 반복해서 쓸 수 있어요.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는 않지만 한 주제를 가지고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같은 주제의 기사를 쓰고 싶어 하는 최 목사에겐 제도권 언론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언론사는 데스크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똑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쓸 수가 없잖아요. 나는 쓸거리가 아주 많은데, 아직 문제도 해결 안 됐는데, 언론사에서는 한두 번하고는 더 이상 반복할 수가 없더라고요.”

독립기자로 일하는 건 고정된 벌이가 없다는 뜻이다. 기사 원고료, 기사에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금액, 각종 강의료와 책을 출판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정도로 생활한다. “원고료 조금 있죠. 대부분 차비값도 안 나오는 경우 많아요. 전국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차비만 얼마겠어요. 거기다가 분석도 해요. 시멘트나 농약 분석 같은 것을 맡기면 또 수십만 원씩 들어요.”

독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공을 들여 취재하고 작성한 그의 기사에 환호한다. 기사 건당 독자들이 후원을 할 수 있는데, 그는 “(기사 한 건에) 150만 원 이상 (후원금이) 붙은 적도 있어요”라고 했다. 그 금액은 온전히 다 받는 것인지 물었더니, “매체에서 20% 빼고 주고 세금이 10% 나가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참고할 자료가 없으면, 직접 연구소에 분석 의뢰

그의 취재 방식은 우선은 자료검색을 광범위하고 깊게 한다. “(서강에 살 때부터) 시멘트 문제를 계속 인식하고 있다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심각한 것이 보이는 거예요. 시멘트에 이런 중금속이 있는데, 하나하나 찾아가다 보니까 논문이 나오고 거기 논문 통해서 다른 논문으로 연결되고 하죠.”

관련한 연구결과가 없으면 직접 연구기관에 의뢰한다. “농약은 대학에 인증센터가 있더라고요. 그런 데에 보내기도 하고, 시멘트 같은 경우는 국가 공인 분석기관이 있어요. 이번에도 농약 분석에 44만 원이 들었어요.”

얼마 전에도 시멘트에서 발생하는 라돈 관련 분석을 의뢰해서 자료를 받았다. “시멘트회사들이 천연석고 대신 방사선 라돈이 있는 인산석고를 사용하는 거예요. 석고가 원래 싸니까, 천연석고를 사용해도 한 집당 1만 원도 차이가 안 나는데 그래요. 그걸 보도했더니, 시멘트협회에서 ‘문제없다’고 소송을 걸어왔어요. 시멘트 자체만으로는 방사능이 기준치 이내라도 물이나 자갈을 섞으면 화학반응이 생기면서 기준치를 초과해요. 그 검사 결과를 받았어요. 소송은 이기고 있어요.”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업체나 산림청과 같은 정부기관들을 주로 겨냥하기 때문에 그는 정정보도 청구나 민형사 소송을 당하는 경우들이 있다.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사를 통해 수많은 환경문제를 개선해온 최 목사는 아직 제대로 바꾸지 못한 것으로 시멘트 문제를 꼽았다. “일본 악성 쓰레기 들어오는 것도 일본으로 되돌려 보냈고 석탄재 수입도 금지시키고 수출입 신고 제도도 만들어지고 했어요. 하지만 ‘쓰레기 시멘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에요. 환경부가 손쉽게 쓰레기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까 이전보다 심각해졌죠. 석회석에 쓰레기를 섞어서 시멘트 만드는 게 환경부가 허가를 해준 거니까 불법은 아니지만, 시멘트 공장을 소각시설로 인정하더라도 최소한 유럽처럼 시멘트안전기준이 필요해요.”

최 목사는 ‘쓰레기 시멘트’ 취재내용을 모아 최근 ‘당신의 집은 안녕하십니까’(황소걸음)라는 책을 냈다.


최 목사가 기자에게 선물한 것은

그는 뛰어난 취재기자이자 사진기자이기도 하다. 최 목사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가져와 인터뷰를 시작할 때 선물로 줬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자연이다. 그는 지난해 ‘리영희상’을 받은 후, 자신이 기사를 게재하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다.

경기 용인으로 이사 온 후, 인근 초등학교 앞 콘크리트 혼화제 연구소 설립을 취재할 때였다. “콘크리트 실험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엄청난 폐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업체는 ‘폐수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어요.” 주변에 아파트와 산이 있었는데 거기에 올라 몰래 망원렌즈로 인부들이 설계도를 들고 왔다 갔다 할 때, 그 설계도를 찍었다. 폐수처리장이 나와 있는 설계도를 들고 시공하는 결정적 장면을 포착한 것이었다. 이런 집념의 원천이 자연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싶다.

최 목사의 기자적인 활약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제보가 폭주한다. “일이 갈수록 많아져요. 전국에서 환경문제가 발생하는데 그분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까 정말 전국에서 연락이 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 현장을 다 다닐 수 없잖아요. 빨리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기사를 쓸 수 있는 젊은 친구들을 후원하고 키워서 같이 일을 나눠서 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시작을 못하고 있죠.”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한계 때문이 크다. “젊은 친구들 같은 경우, 이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제가 장려를 못 하는 게 생활 보장이 안 되니까요.” 최 목사의 저널리즘 활동에 이 사회는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그만큼의 대가는 지불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좋은 저널리즘은 왜 별로 돈이 되지 않는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풀지 못한 숙제이다. 그럼에도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취재하고 기사를 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데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대가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바꿔 내야 할 중요한 일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거죠. 내가 기사를 쓴 거를 실어줄 공간이 있다는 게 감사하죠. 20년 더 전에 태어났다면 (인터넷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 이걸 못했을 거 같아요.”

올해 우리 나이로 61세(만 60세)인 최 목사는 말했다. “페이스북에도 썼어요. 내가 치매 걸리지 않고, 운전을 해서 다닐 수 있는 힘이 있는 날까지 이 일을 계속할 거라고요.”

이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