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안쪽으로!”
지난달 15일 경기 의정부컬링경기장에 중년 남성의 중저음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서정우(49)씨가 얼음판 위에 노란색 손잡이가 달린 컬링스톤을 투구하자 손진석(52)씨가 이를 따라가며 브룸(빗자루)을 이용해 얼음 바닥에 스윕(얼음을 문지르는 동작)을 시작했다. 서서히 속도를 늦춘 스톤이 반대편에 위치한 하우스(스톤 도달 지역에 그려진 원의 안쪽 모든 지역) 위에 멈추자 김성환(54)씨와 정원석(55)씨가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번에는 정채연(20)씨가 빨간색 손잡이가 달린 스톤을 내려놓고 손진아(20)씨가 스윕을 시작했다. 새 스톤이 기존 스톤을 밀어내고 하우스 위에 자리하자 채연씨와 진아씨가 중년 남성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들은 각각 정원석씨와 손진석씨의 대학생 자녀들이다. ‘부녀간 맞대결’은 몇 차례의 투구가 더 이어진 끝에 결국 딸들의 6-1 승리로 마무리됐다.
컬링 동호회 ‘한양패밀리’ 멤버들의 연습 경기 모습이다. 개인 사정으로 '결석'한 김정영(61)씨까지 총 5명이 활동 중이다. 나이도, 사는 지역도 제각각인 이들이 함께 컬링을 하게 된 건 바로 자녀들 때문이다. 손진석씨는 “딸(진아씨)이 한양초등학교 컬링부였는데, 태릉 컬링장까지 데려다주고 연습을 관람하다가 다른 학부모들과 안면을 트게 됐다”고 설명했다.
물론 학부모들의 친분이 곧바로 컬링 동호회 창설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손씨는 “아이들이 중학교 진학 후에도 취미 활동으로 컬링을 하고 싶어 했다”며 “그래서 아빠들이 직접 운동을 배워 자녀들과 연습을 해주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며 결성 배경을 설명했다.
의기 투합한 아빠들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호회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약 두 달간 매주 토요일 인천빙상경기장에 모여 컬링을 배웠다. 처음에는 자녀들과 함께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시작했지만, 모이는 횟수가 늘면서 중년 남성들도 어느덧 컬링의 매력에 푹 빠졌다. 서정우씨는 “빙판 위 40m 떨어진 곳에, 그것도 내가 원하는 지점에 스톤을 갖다 놓는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며 “또 스위핑이 체력 소모가 많은 전신운동이라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김성환씨도 “얼음판 위에서 균형을 맞춰야 해 하체 운동이 많이 된다”며 “나이가 들어도 관절부상 위험 없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고 컬링의 매력을 설명했다.
이번엔 딸들이 컬링 예찬론을 펼쳤다. 진아씨는 “아버지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격한 운동이 아니다 보니 노년에도 충분히 도전해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또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려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채연씨는 “가족들과 함께 운동하면 친구들과 놀 때와는 다른 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며 “연습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밝혔다.
이날 연습에는 두 명의 자녀만 참여했지만, 이들이 속한 ‘한양 클럽’ 회원은 총 13명이다. 아직 고등학생 등 수험생이 많아 현재는 대학생 자녀들 위주로 아빠들과 훈련한다. 한양패밀리 멤버들은 이들이 모두 성인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컬링장에 함께 서기를 기대하고 있다. 정원석씨는 “캐나다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며 “한양패밀리 멤버들도 몸 관리를 잘하면 손주들과도 컬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한양패밀리 멤버 중 50세가 넘은 이들은 지난해 말 열린 ‘2023 세계시니어컬링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나섰다. 비록 대표팀에 들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김성환씨는 “대표팀으로 뽑힌 강릉팀은 오랫동안 자주 손발을 맞춘 팀”이라며 “우리도 꾸준히 연습해 다시 대표팀에 도전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