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냐, 수가냐.
응급실에, 수술실에, 그리고 지방에 '사람 살릴 의사'가 부족한 건 하루이틀 얘기가 아니다. 그때마다 정부와 시민단체는 3,058명으로 고정된 의대 정원을 확대할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번번이 의사단체의 격렬한 반대 탓에 뜻을 접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사안의 본질은 낮은 의료 수가(국가가 정한 의료 서비스 가격)"라며 당장 수가부터 올리라며 반박한다.
누구 말이 맞는 걸까. 왜 이견을 좁히지 못했나. 단순히 '정원'과 '수가'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선 해법을 찾기 어렵고, 어느 한쪽 얘기만 들어 풀릴 매듭도 아니다. 방향을 정하려면 '정원론자'와 '수가론자' 양쪽 의견을 세밀하게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통분모를 찾기 위한 옥석을 가려내기다.
이를 위해 한국일보는 필수의료 해법을 둘러싼 △양측 주장을 점검하는 기초 파트(현재 기사), △실질적 대안을 파고드는 심화 파트(다음 기사)로 나눠 관련 논쟁을 총정리했다. 정부, 학계, 일선 의사, 시민단체 등의 의견을 두루 들었다. 다만 의협은 국회의 간호법 처리 대응에 집중하겠다며 답변을 주지 않아 기존에 나온 의협 입장으로 대체했다.
먼저 기초 파트에선 정원과 수가를 둘러싼 7가지 질문을 함께 풀어보며 사안의 본질로 들어간다.
논란이 된 의대 정원의 역사부터 짚어 본다. 정원은 현재 3,058명. 18년째 그대로다. 정부는 2000년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달래기 위해 당시 3,507명(정원 3,253명·정원 외 140명·학사편입 114명)이던 의대 정원을 10% 감축해 3,058명(2006년)으로 줄였다. 약사에 조제권을 넘겨주며 수익이 줄어든 것에 반발한 의사단체의 요구를 정부가 받은 것이다.
이후 의사들은 '3058 철옹성'을 강력하게 사수했다. 2012년 5월 이명박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논의하는 TF를 구성했지만, 의사 단체의 협조를 받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연 400명씩 10년간 4,000명을 늘리려 했지만 의사들이 총파업으로 막아섰다. 파업 당시는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이었다.
여기서 던지는 질문. 왜 국가가 나서 의대 정원을 정하는 걸까? 의료는 시장에만 맡길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부족해 의료 체계가 붕괴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대부분 나라는 의대 정원 숫자를 조절한다. 이 지점에서 정원 확대 찬성론자들은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를 지적한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 교수는 "한국 의사들은 공공성 명분으로 도입된 '국가 보호'를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의대 정원 제한이 '의사 카르텔' 유지에 기여했다는 우회적 분석도 가능하다.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소득'. 한국 의사 소득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상위권이다. 구매력평가환율(PPP) 환산 시 때 봉직의·개원의 모두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타 직종과 비교해 보면 2020년 기준 국내 의사 평균 임금은 2억 3,070만원(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으로 같은 해 일반 정규직 근로자의 연봉 4,431만 원(통계청)의 5배가 넘는다.
소득 얘기를 하면 의사들은 억울하다고 한다. 10년, 11년에 걸친 의대·전문의 교육에 들인 시간과 노력, 수련 과정의 고생과 중노동, 수억 원에 달하는 개원 비용 등을 감안하면 '인풋 대비 아웃풋'(투자 대비 효용)이 결코 높지 않다는 항변이다. 수도권 의대를 졸업한 일반의 A씨는 "겉으론 많이 버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남들의 두세 배 버는 게 과하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늘릴지, 말지를 논하려면 먼저 의사 수가 진짜 부족한지 아닌지부터 따져야 한다.
부족하다는 쪽에서 내놓는 통계는 꽤나 많다. 한국은 ①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가 2.5명으로 OECD 평균(3.7명)에 훨씬 못 미친다는 통계가 가장 많이 인용된다. 한의사를 제외하면 2.0명으로 최하위다. ②의학계열 졸업자도 인구 10만명당 7.2명으로 일본·이스라엘(6.9명)에 이어 세번 째로 적다. ③OECD 평균 3배 수준으로 많은 병상수(인구 1,000명당 13.2개)도 의사 수 부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수치다. ④대형병원, 대학병원에 생긴 의사의 빈자리를 의료지원인력(PA) 간호사가 대체하는 현실도 의사 수 부족을 증명한다.
이런 숫자들만 보면, 의사가 부족하다는 데 이견을 내기 어렵다. 하지만 의사 단체들은 "의료 접근성과 이용률은 세계 최고이고, 국민건강지표(기대 수명, 주요 질환별 사망률 등)도 최상위원"이라며 의사 수는 지금도 충분하다고 반박한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이준영(38·가명)씨는 "한국처럼 대학병원에 쉽게 방문하고, 동네에서 편하게 전문의 만날 수 있는 나라가 또 어디 있느냐"고 반박했다.
의사들 말처럼 한국인이 병원을 너무 쉽게 간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국민 1인당 외래 진료를 받은 횟수는 연간 14.7회로 OECD 평균(5.9회)의 2.5배다. 입원환자 1인당 평균 재원 일수는 19.1일로 일본(28.3일) 다음으로 길다.
다만 의사가 없어 사람 죽는 일이 반복되는 건 결코 우연의 연속이 아니다. 치료 가능한 응급실을 찾지 못해 2시간 넘게 구급차에서 표류하느라 숨진 대구 10대 여학생 사망 사건, 지난해 7월 국내 최고 병원에서 개두술 수술 의사가 없어 골든타임을 놓치고 숨진 뇌출혈 간호사 사망 사건을 보면 "의료 접근성이 좋다"는 주장이 다 맞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의사단체들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논리로 인구 감소(지난해 합계출산율 0.78명) 카드를 꺼낸다. 인구가 줄면 의료 수요 역시 감소할 테니, 현재 의사 수 증가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탓에, 의료비를 많이 쓰는 노인이 늘면 의료 수요는 쉽게 줄어들기 어렵다.
지난해 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35년 국내 의사 수가 수요 대비 2만 7,232명 부족할 것이라는 전망치를 냈다. 이에 대해 의사단체에선 "의사의 연간 근무일수를 현실보다 적게 잡고, 기술 발전에 따른 업무 효율성을 무시했다"며 해당 보고서가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고서를 작성한 보사연 측은 2040년대 초반까지 의료 이용량이 늘어나고 의사 수가 모자란다는 결론에 변함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의사 부족 문제를 '전체 숫자'로만 접근하면 본질에 다가가기 어렵다. 의사가 부족하게 만드는 '구조'까지 함께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윤석준 교수가 '병상 대비 의사 수'를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의사 수는 한정됐는데, 대형병원들이 병상을 무한 확장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란 지적이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과 교수의 진단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의사 수 부족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의료 수요보다 많이 우후죽순 생겨난 병원 △나눠먹기 식 인력 배치로 의사가 '분산'된 점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의사 부족 문제의 핵심은 '총량'도 부족하지만 '편중' 문제가 크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당장 기피과에서 일할 의사가 부족하다지만, 알고 보면 기피과 전문의 전체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주요 바이탈과(사람 목숨을 주로 다루는 과) 전문의의 인구 대비 숫자를 미국과 비교하면, 신경외과 3.5배, 외과 1.7배, 산부인과 1.6배, 흉부외과가 1.3배 많다.
그럼에도 종합병원마다 의사가 없다고 아우성인 이유는, 일반의와 전문의까지 너도나도 로컬(개원가)로 빠지고 있어서다. 서울의 의원에서 봉직의(페이닥터)로 일하는 내과 전문의는 "현장에서 보기에 핵심은 편중"이라며 "△대형 종합병원과 개원의 △기피과와 인기과 △지방과 수도권 간의 격차가 문제라, 의사를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를 늘리면 그 의사들이 어디로 갈 지를 예상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의대 정원 확대론자들은 '낙수효과'를 기대한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 교수는 "저수지에 물이 말라 논밭으로 흘러가지 못하니, 비가 왕창 오든, 물을 쏟아붓든 우선 절대량을 채워넣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그래야 마른 논밭(필수·지방의료)에 조금이라도 물(의사)이 돌아간다는 논리다. 당장 △의대 정원 숫자를 넘어서는 전공의 모집 인원 △급격히 늘어나는 병상수만 보더라도, 수요를 뒤따라가지 못하는 공급(의사 배출)을 채우는 게 맞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일축한다. "늘어난 의사들도 똑같이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정재영(정신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 등 '워라밸과'로만 몰려갈 것"이란 우려다. 기피과를 멀리하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의대 정원을 늘려 응급실과 지방병원 의사를 길러내리라는 기대는 '일방적 착각'이라는 거다.
물론 의대 정원 확대론자들도 '욕망'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공공의대 설립 △지역의사제 도입 등으로 정부가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필수 지방의료를 살려야 한다고 본다. 의료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사 증원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란 지적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늘어난 의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새로운 의료 수요를 창출할 것이고, 그 결과 되레 의료 체계가 붕괴할 것"이란 주장을 편다. 가장 우려하는 건 의료비 지출 증가다.
통상의 재화·서비스 시장에서 공급이 증가하면 가격이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의료시장은 다르다. 공급자(의사)와 수요자(환자) 간 정보 비대칭성 때문에 의사가 적정 수준을 초과하는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의사가 권하는 진료를 환자가 거절하기 어려워 과잉진료가 발생하게 된다"(서울의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논리다.
이 가설을 또 반박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의사들이 주장하는 의사유인수요론과 목표소득가설은 의사가 충분하거나 남을 경우에나 적용되는 이론"이라며 "한국은 의사 수 부족이 의료 단가를 올려서 최대한의 의료를 창출하고 있는 상태인데, 의사들이 이런 상황을 유지하려고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정원 확대가 답이 아니라는 의사들은 '수가 인상'을 말한다. 한국 의료비용 체계의 골격은 '행위별 수가제'다. 진료, 검사, 수술 등 의사들이 제공하는 '행위'에 따라 가격을 매겨 건강보험에서 지불하는 제도다.
현장 의사들은 이 '노동의 대가'가 형평성 있 게, 합리적으로 지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불만은 "검체나 영상 등 장비가 일하는 분야의 보상률은 높고, 사람의 노동을 갈아넣는 고도의 수술 행위 수가는 비현실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의사 사회 내부적으로도 수가를 어느 쪽으로 '우선 분배'해야 하는지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보건의료행정 전문가는 "쓸 수 있는 돈(건보재정)은 고정돼 있고, 그 안에서 파이를 나눠먹는 상황"이라며 "어느 전공도 양보하지 않고 다들 '우리가 제일 어렵다'고 아우성이라 드라마틱한 조정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필수과의 수가를 현실화하려면, 영상검사 등 개원의들이 꽉 잡고 있는 분야의 수가를 일정 부분 내리는 일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자기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는 성인군자는 자본주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필수과 의사들은 억울하다고 말한다. 정순섭 이대목동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사실 바이탈과 의사들은 수술 챙기느라 수가 협상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해, 의사 업무량이 낮게 평가되는 왜곡을 바로 잡지 못했다"며 "지금이라도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답답해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수가 구조를 방치한 채로 수가 인상에 나서면, 오히려 인력 시스템의 왜곡을 심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가 필수과 지원 명목으로 특정 수가를 인상하면 수가가 오른 과의 대형병원 전문의이 개원가로 빠져 나가는 현상이 이어진다. 그래서 필수과 의료 현장에선 "수가 인상으로 개원의만 배불린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 재정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윤석준 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조현병으로 들어오는 응급 환자가 늘어난 사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 상담 수가를 늘렸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조현병 응급환자를 치료해야 할 종합병원 정신과 선생님들이 다 개원의로 빠져버렸어요. 이런 식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지방 종합병원 교수 B씨 역시 "필수 의료를 살리기 위한 수가 인상에 지금처럼 개원의를 포함하는 건 정의롭지도 못하고 실효성도 떨어진다"고 꼬집었다.
수가 인상이 만능키가 될 수 없다는 건, 흉부외과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2009년 정부는 흉부외과 수술 수가를 100% 인상했으나, 이 돈이 의사들에 대한 직접 보상(인건비) 대신 병원 운영비로 쓰이면서 일종의 '배달사고' 논란이 불거졌다. 고유가 상황에서 정부가 유류세를 낮춰도 정유사나 주유소가 인하분을 흡수해 버리면 소비자가 혜택을 보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결국 수가가 올랐음에도, 흉부외과는 여전히 정원의 절반도 못 채우는 기피과 신세다.
A교수는 대형병원 필수과에 의사들을 붙잡아 두려면, 대학병원에서 필수의료 의사들을 직접 지원하는 수가 인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온콜(병원 밖 야간 대기) 수당, 당직 수당 인상 등이 거론된다.
윤석준 교수는 소방서 운영을 예로 들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불이 매일 나지 않아도 전국에 소방서가 있고 소방관을 배치하잖아요. 응급실이나 수술 많은 필수 의료도 마찬가지죠. 당장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대기 시간 자체에 대한 보상이 필요해요. 수가는 이렇듯 정말 필요한 곳에, 필요한 걸 올려주는 유인책으로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윤 교수는 "필수 의료를 살릴 개입은 필요하지만, 건보 재정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마구잡이 식으로 수가를 올리는 건 가능하지 않다"며 "시스템 전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살피는 작업이 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정원 확대냐, 수가 인상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논쟁의 틀을 벗어나는 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라고 입을 모은다. ①적정 수준 의사를 어디에 어떻게 늘릴지 ②수가를 어떻게 '적재적소'에 올려줄지, 그에 따른 파급 효과를 정밀하게 예측한 논의가 맞물릴 때 필수·지방 의료 현장을 떠나는 의사들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들 하잖아요? 한국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풀려면 '디테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디테일에!" 윤석준 교수의 다급한 외침이다.
※'정원 확대-수가 인상' 논쟁 총정리(심화편) 기사로 이어집니다.
(https://hankookilbo.com/News/Read/A2023042615080000089?did=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