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에는 보이지 않고 계산되기 어려운 성과들이 많다. 그중 만남으로 쌓인 정상 간 신뢰는 중요한 외교적 자산이다. 외교무대에 서 본 당국자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것도 정상 사이 신뢰야말로 현안을 푸는 ‘만능키’라는 경험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국빈 방미가 갖는 의미도 예외는 아니다. 백악관의 극진한 대접, 워싱턴의 우호적 분위기는 한미 관계의 또 다른 디딤돌이 될 것이다. 대미 현안을 책임진 당국자 말대로, 지금 한미 관계는 2기 오바마 정부 시절의 역대급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동맹 70주년의 뜻이 깊다고 해도 외교에서 공짜 밥이란 없기 마련이다. 미국의 ‘친구 도청’에서 보듯 동맹이라도 국익을 위한 전쟁 같은 밀고 당기기는 불가피하다. 게다가 이번 회담은 북핵 위협과 미중 전략경쟁의 변곡점에서 열렸다. 하지만 1호 영업사원 상대는 50년 경력의 노련한 정치인. 부통령 때 바이든이 ‘미국 반대 편에게 베팅은 좋지 않다’는 말로 박근혜 정부의 친중 행보를 노련하게 직격한 건 지금도 회자된다. 평가하기 이르긴 하나 이번에 백악관 주인은 밥값을 톡톡히 챙긴 것 같다.
윤 대통령은 출국 전 우크라이나, 대만해협 문제로 러시아, 중국과 설화를 겪었다. 한 달 전에는 정치적 역풍을 감내하며 한일 과거사 해법의 방향을 틀었다. 미국이 바라던 3박자 맞춤 선물을 한 셈인데 이에 비해 바이든 대통령의 답례는 아쉬운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그는 대일본 외교적 결단을 콕 짚어 ‘감사하다’고 했을 뿐이다. 적어도 미중 경제전쟁에 우리 기업 희생을 최소화해야 하는 점을 분명히 했다면 지금의 어색함은 없었을 것이다.
작년 윤 정부 출범 열흘 만에 한국을 찾은 바이든은 번영의 공유를 약속했고,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1년도 안 됐지만 약속을 흔드는 미국 자국 우선주의는 한두 개가 아니다. 윤 정부의 2030년 10기 원전 수출 정책도 실은 미국이 발을 걸고 있다. 폴란드 원전에 이어 체코 사우디 원전 수주에서 한국을 배제시키려는 의도까지 보이고 있다. 윤 대통령 방미 하루 전 외신에 공개된 백악관 청구서의 경우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중국의 미국 업체 제재로 생길 공백을 삼성 SK가 어부지리 하지 말라는 요구인데 이러다간 종국에 중국시장 공동 철수 요구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의 과한 국익 우선은 내부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집착하는 특유의 풍토에서 연유를 찾을 수 있다. 테러와의 전쟁 실패가 베트남에서처럼 현지 집단 정체성을 간과한 데서 비롯됐다는 비판도 맥락이 다르지 않다. 여기에 치적이 필요한 바이든의 재선 일정도 동맹 배려를 어렵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그러나 대중 견제가 뚜렷한 첨단기술 동맹의 결과마저 이렇다면 이를 동맹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 중국은 우리에게 신뢰 문제가 컸다. 문재인 정부는 ‘안미경중’의 균형외교를 취했지만 중국이 수차례 양국 신뢰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중국 불신 여론은 대일 감정을 넘어섰다. 정권 교체 후 우리의 고민은 미국으로 바뀌었다. ‘안미경미’를 추구할 때 경제, 통상의 해법이 쉽지 않은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초당적으로 보여도 유동적인 게 사실이다. 당장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중국 배제의 공급망 재편을 재앙으로 표현했는데, 요소수 사태에서 경험했듯 그의 경고는 한국에 더 치명적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확장억제와 관련해 미국이 신뢰할 만한 신호를 보낸 건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국가주의 정서가 강한 보수층, TK지역에서 대통령 지지층 이탈이 일본 방문 이후 뚜렷해진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이든이 밥값 챙기기보다는 두둑한 신뢰의 선물을 안겨야 양국 고민은 풀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