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경기 구리시의 한 오피스텔. 낡은 연립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가 복판에 자리한 최신형 오피스텔이라 눈에 잘 띄었다. 3년 전 지어져 외관도 깔끔했다. 젊은층의 선호도가 높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입주자들의 얼굴빛은 좋지 않았다. 지난해 말부터 젊은 임차인들을 중심으로 전세사기 피해 신고가 잇따르자 졸지에 전세 난민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등이 켜진 탓이다.
이날 오피스텔 앞에서 만난 60대 여성 세입자는 “다음 달이면 2년 전세계약이 끝나기 때문에 집 주인에게 여러 번 전화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하다”며 “전세 보증금이 1억 원이 넘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니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30대 세입자도 "2년 전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해 보증금을 다 돌려받고 나갈 수 있게 됐지만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이웃들은 전 재산을 떼일 수도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구리경찰서에 따르면, 이 오피스텔 한 곳에서만 만기일이 지났는데도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가구가 10곳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90여 가구 중 10%가 넘게 피해를 본 셈이다. 피해자 대부분은 자금 사정이 넉넉지 못한 2030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 신혼부부들이었다.
사전에 전세사기 징후가 있었으나 피해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오피스텔은 2019년 분양을 시작했으나 입주 시기인 2020년 9월까지 미분양이 많았다. 때마침 전세가격이 치솟아 매매가(1억7,000만 원~3억 원)에 육박하자 사업자들은 “전세금으로 분양대금을 치를 수 있다”며 홍보전에 나섰다.
한 공인중개사는 “당시 사업자들이 미분양물을 털어내기 위해 ‘전세 보증금만으로도 오피스텔을 살 수 있다. 부가세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홍보하며 주택을 팔았다”며 “돈 한 푼 없는 사람들이 오피스텔을 사서 전세를 놓고 그 보증금으로 매매대금을 치렀으니 집값 하락 국면에서 사달이 안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 부동산 빅데이터업체 ‘디스코’에 따르면, 이 오피스텔의 2021년 1월 이후 2년여간 매매가 대비 평균 전세가율은 95.7%에 달했다.
현장에선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들려왔다. 30대 임차인 A씨는 2020년 말쯤 보증금 1억7,000만 원을 주고 이 오피스텔에 전세로 들어왔다. 보증금의 80%가량은 청년 전세자금대출로 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당시 전세 보증금이 매매가격에 육박하는 ‘깡통전세’ 피해가 우려된다는 주변 만류에도 이 오피스텔을 계약했다가 피해를 입었다. 그는 “전세사기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구리경찰서는 전날 전세사기 주범인 B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B씨는 구리 오피스텔을 비롯해 서울과 인천 등에 수백 가구의 주택을 소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B씨 명의 주택만 500여 채, 다른 일당 명의로 된 주택까지 더하면 900여 가구에 달한다. 주택은 임차인으로부터 받은 전세 보증금으로 매매 대금을 지급해 현재는 보증금 지급을 못하는 ‘깡통전세’가 대부분이다. 피해자는 50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B씨와 결탁해 임차인을 모집하는 등 전세사기에 가담하거나 연루된 공인중개사 수백 명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