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조끼 입고 제단에 서다

입력
2023.05.01 04:30
24면
Frank T. Griswold(1937.9.18~2023.3.5)

2003년 11월 2일, 미국 뉴햄프셔대 위트모어센터에서 미국성공회(Episcopal Church) 신부 진 로빈슨(Gene Robinson, 1947~)의 주교 서품식이 열렸다. 1785년 이래 미국성공회의 993번째 주교가 탄생하는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여느 때와 사뭇 달랐다. 교구 역사상 최다 인원인 신도 등 4,000여 명이 운집했고, 재단 주변에는 보도진도 포진했다. 경찰은 행사장 안팎을 삼엄하게 경비하며 행사장 바깥에 모인 성난 시위대를 통제했다.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를 통틀어 기독교계 최초로, 스스로 인정한 동성애자 사제가 사도권의 상징인 성장(聖杖, 주교 지팡이)을 쥐는 자리. 서품식을 집전한 미국성공회 수장인 의장주교(presiding bishop)도, 상시적인 살해 협박을 받아오던 로빈슨과 그를 보좌한 부제도 전례복 속에 방탄조끼를 입었다.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마침내 이른 자리였다. 행사 한달 전인 10월 교단 보수단체인 미국성공회협의회(AAC) 성직자와 신자 1,400여 명은 텍사스주 댈러스에 모여 로빈슨의 교단 탈퇴를 촉구하며 미국성공회와 분리된 별도 교단 구성을 결의했고, 세계 성공회연합(Anglican Communion)은 영국 런던에서 비상 관구장회의를 소집했다. 영국국교회 수장이자 성공회연합 의 영적 지도자인 캔터베리 주교 로언 윌리엄스(Rowan Williams)는 미국성공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 성공회 주교들과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나이지리아 주교(Peter Akinola)는 게이 주교 서임을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나이지리아 성공회는 신도 수가 미국(230만 명, 당시 기준)보다 7배가 넘는 1,700만 명의 거대 관구였다.

하지만 미국성공회 입장은 단호했다. 신임 주교가 뉴햄프셔 교구 신자와 사제 압도적 다수의 추대를 받아 교회법이 정한 사제단회의와 주교회의 심사-표결 절차를 통해 선출됐고, 그의 성정체성이 그 모든 절차를 무효화할 만한 변수가 될 수 없다는 거였다.
무엇보다 의장주교 프랭크 그리스월드(Frank T. Griswold, 1937.9.18~2023.3.5)의 의지가 확고했다. 주교회의 표결 직전인 9월 AP 인터뷰에서 그는 “내게 중요한 것은 성(지향)이 아니라 교구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보수 진영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성경 어디에도 동성애를 부정한 구절은 없다고도 말했다. “성서에 개별적 동성애 행위를 비난하는 구절은 있지만, 그건 욕정 행위(acts of lust)를 겨냥한 것이지 동성애자의 ‘사랑과 용서, 은혜’를 정죄하려던 것이 아니다. 성경 시대에는, 다시 말해 성서에는, 오늘날의 성지향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뉴햄프셔 주교의 서품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 우리가 속한 더 큰 사회의 현실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서품식에서 그리스월드는 “행사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발언해달라”고 청한 뒤 신도들에게 “존중과 예의를 갖춰 경청해달라”고 당부했다. 피츠버그 교구 신부(Earle Fox)는 “심장이 찢기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동성애 행위의 디테일을 지독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뒤 정죄의 당위성을 피력했고, 뉴햄프셔의 한 평신도(Meredith Harrwood)는 “사제 봉헌을 강행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는 짓이자 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라며 혼외 성행위는 잘못이라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불의에 빠지지 말라는 전세계 대다수 성공회 신자들과 세계교회운동(에큐메니칼) 진영의 거듭된 요청에 귀를 막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올버니 주교(David Bena)는 서품에 반대한 주교 36명의 공동 성명서를 낭독했다. “(이 봉헌은) 교회의 역사적 신앙과 규율에 극단적으로 반하는 조치다.(…) 이 분열적 행위에 가담한 사람들의 행동에 슬픔을 표한다.”
그리스월드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모든 의견은 주교회의 등 절차를 통해 이미 충분히 논의된 사안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지금 우리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친교의 신비를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진 로빈슨 사제를 주교로 서품하는 것이 여러분의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현장을 취재한 한 매체는 “그것이 우리의 뜻”이라는 회중들의 함성으로 행사장 지붕이 들썩일 정도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여성-성소수자 사제 서품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미국성공회가 안으로 분열하고 바깥으로 배척당하던 1998년 의장주교를 맡아, 신앙과 중도-다양성의 성공회 정신을 사회적 가치-정의와 융합하려 했던 성공회 사제 프랭크 그리스월드 Ⅲ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미국성공회와 AC의 갈등은 1988년 매사추세츠 교구의 첫 여성 주교 바버라 C. 해리스(Barbara C. Harris, 1930~2020) 서임을 두고 본격화했다. 세계 성공회 교회 대부분이 여성 주교는커녕 사제 서품에도 반대하던 때였다. 그 갈등의 앙금이 여전하던 89년, 공개 동성애자 로버트 윌리엄스(J. Robert Williams, 1955~1992)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일부일처제를 부정하는 등 지나치게 급진적인 발언이 겹쳐 교단 안팎의 거센 압박에 서임 6주 만에 사제복을 벗었고, 91년 교단을 떠났다.

그리스월드가 의장주교에 취임하던 1998년 미국성공회가 처한 상황이 그러했다. 성공회연합과의 알력과 여성 사제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던 4개 교구를 비롯한 미국 성공회 내부의 분열, 만성적인 재정난과 일부 성직자의 독직사건까지 겹쳐 있었다.

임기 9년의 의장주교 취임을 앞둔 1998년 1월, 뉴욕 엘미라의 베네딕토수도원에서 피정하던 만 60세의 그리스월드는 교계 매체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의장주교의 직분 때문에 나는 좋든 싫든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고, 아마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는 내가 인간다운 존재가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나는 살아있는 이슈(living issue)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며 “소외되고 존재마저 부정당한 일부 신자들도 교단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대화를 통해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월 10일 워싱턴D.C의 전미성공회대성당에서 열린 취임식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유대교, 정교회 대표뿐 아니라 미국성공회 역사상 처음 미국무슬림위원회 의장도 참석했다. 그리스월드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고뇌와 어리석음과 은혜와 진실의 뭉치들”이라며 그 때문에 “여러분의 진실과 나의 진실이 서로 대화하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각자 지녔던 과거의 진실을 확장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며 “그것이 우리가 대화라고 부르는 성스러운 사업의 본질이며, 바로 거기에 회심의 가능성, 새로운 길을 찾을 가능성이 내포돼 있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친교의 신비를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프랭크 그리스월드, 2003년 11월 진 로빈슨 주교 서품식 미사에서.

프랭크 트레이시 그리스월드는 펜실베이니아 브린모어(Bryn Mawr)에서 직업 카레이서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교와 의장주교를 배출한 성공회 집안이었고, 그리스월드도 10대 때부터 성직자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는 59년 하버드대를 졸업(영문학)한 뒤 총회신학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 오리엘(Oriel) 칼리지에서 신학 학사(62)-석사(66년) 학위를 받았다. 62년 말 부제, 63년 6월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85년 주교가 될 때까지 펜실베이니아주 여러 교구에서 사역했고, 시카고 주교(87~98)를 거쳐 미국성공회 제25대 의장주교가 됐다.

그는 60년대 펜실베이니아 한 교구 사제 시절 만난 동성애자 커플 덕분에 동성애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발성경화증을 앓고 있던 남성과 그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던 파트너를 지켜보며 그 사랑이 성경의 가르침에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는 것. 그는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다’고 말씀하는 대목이 있다. 그건 하느님의 진리가 ‘말씀 너머’에서 더 넓게 펼쳐지고 있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과학이 가져다준 새로운 진리와 의학적 발견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왜 성에 대해서는 새로운 진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화가 나 있는 이들은 대부분 확고한 이성애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달리, 교회의 자비로, 마음껏 이혼-재혼하지 않는가.”

1987년 시카고 주교 취임 당시 단 한 명의 여성 사제도 없던 교구는 그가 떠나던 98년 41명의 여성 사제(총 146명)가 미사를 집전했다. 게이 신부 윌리엄스의 낙마 후폭풍이 한창이던 94년 그는 “성지향은 도덕적 선도 악도 아니며, 서로 충실하고 헌신적인 동성애 관계는 명예로운 것”이라는 내용의 주교 80명 공동성명에도 동참했다.

2003년 서품식에서 로빈슨에게 교구를 물려준 전임 더글러스 튜너(Douglas Theuner) 주교는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가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헌신이었고, 그분의 분노는 주로 당시 종교 조직을 향한 것이었다”며 “후임 주교는 우리 중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단합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했다. “크리스천의 덕목 가운데 가장 찾기 힘든 덕목인 겸손을 추구하시라. 당신의 훌륭한 은사로 당신의 형제자매가 차별당하지 않도록 힘써 달라.” 로빈슨 신임 주교는 “이 자리는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소외돼온 수많은 이들을 위한 자리이고, 그들을 가장자리가 아닌 한가운데로 초대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가시밭길은 봉헌식 이후 더 거칠어졌다. 윌리엄스 캔터베리 주교는 성명을 통해 미국성공회로 인해 격화된 교단 분열에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진 로빈슨을 서품한 이들은 미국교회법에 따라 선의로 행동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비서구 세계의 압도적 다수 신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한다. 성공회의 지역적 자율성은 중요한 원칙이지만 우리는 규칙보다 관계에 더 많이 의존하며, 협의와 상호의존은 성공회의 건강성에 필수적인 덕목이다”라고 밝혔다. AAC 역시 성명을 내고 “이단이 거룩한 것으로, 신성모독이 축복으로 재정의되었다.(…) 때가 왔다. 가족은 분열되었고 성공회는 찢겼다. 재편이 시작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스월드는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은 주교 한 사람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버지니아주 8개 교회를 시작으로 일부 보수 교회가 미국성공회 탈퇴 계획을 잇달아 발표했고, 2009년 신도 수 약 10만 명의 북미성공회(Anglican Church of North America)를 결성, 미국성공회와 별도로 성공회연합의 일원이 됐다.

그리스월드 임기 마지막 해에 추대된 후임 의장주교 후보는 모두 7명이었고, 그중 3명은 로빈슨의 주교 임명에 반대한 이였다. 주교단은 캐서린 J. 스코리(Katharine Jefferts Schori, 1954~)를 성공회연합 역사상 첫 여성 의장주교로 선출했다. 미국성공회는 2009년 주교의 성정체성 차별을 공식 폐지했고, 2012년 트랜스젠더의 사제 자격을 인정했고, 2015년 동성결혼을 공개 지지했다. 로빈슨 이후 12년 만인 2015년 영국국교회에도 첫 공개 동성애자 주교(Nicholas Chamberlain)가 탄생했다.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정체성은 주교 서임에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고 공식 천명했다.

그리스월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학구적 신학자였다. 1979년 평사제로서 가톨릭과의 공동기도문 집필에 참여했고, 다수의 신학서와 에세이를 출간했다. 2001년 의장주교로서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와 교단 성직자 및 교회를 공유하고 공동의 선교활동을 추진하는 ‘완전 친교관계’ 합의를 이룸으로써 에큐메니컬 운동의 숙원 하나를 이루었고, 성공회-로마가톨릭 국제위원회 공동의장(1998~2003)도 지냈다. 그는 위트 있는 말로 좌중의 긴장을 눅이는 데 무척 능했다고 한다. 후임 의장주교 스코리는 그를 “평화의 중재자(peaceable diplomat)”라 평했다. 그것이 성공회의 전통에 스민 ‘4대 정신(레터에서 상술)’, 즉 중도(via Media)와 포용, 모호성(열린 태도), 다양성-일치의 가치 안에 새로운 가치를 접목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한 보수 사제는 97년 인터뷰에서 “프랭크는 언제나 기꺼이 내 말을 듣곤 했다. 우리 견해가 늘 일치하진 않았지만, 그는 항상 좋은 대답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고, 익명의 한 사제는 “그와 같은 리더 덕분에 우리는 더 나은 교회가 됐다”고 말했다.

2006년 은퇴 후 그는 한국을 비롯, 세계 각지를 돌며 대학과 교회에서 강의-강론했다. 20대 시절 교회에서 만난 피비 웨철(Phoebe Wetzel)과 65년 결혼해 딸 둘을 낳고 해로했고, 틈틈이 요가와 명상 하이킹을 즐기며 시집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은퇴 인터뷰에서는 그는 “낫질을 좋아한다. 풀은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 방식으로 순종할 줄 알기 때문이다”라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만나 씨름했던, 수많은 고집쟁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