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마트, 맨홀, 주차장, 카페, 편의점······.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글쓰기를 독려하고 공모전을 열어 모은 10여년 치의 수기들 중 일부를 엮어냈다. 그런데 목차부터, 고개만 돌리면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일상적인 공간만 44개나 나열돼 있어 특이하다. 바로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떠받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터다.
파견계약직, 외주용역, 프리랜서. 이들은 불리는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일상이 된 차별과 무시, 열악한 업무 환경과 처우, 불안한 미래 등 이들의 처지는 대개 비슷하다. 하지만 이 불평등은 게으르게 산 사람들이 응당 받는 형벌이 아니다.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 술집에서 서빙을 한 신진호씨는 복학을 위해 돈이 필요한 휴학생이었고, 첫 공사현장에서 일당 3만1,500원을 번 리우진씨는 반년 넘게 공연을 못 한 연극배우였다. 임산부라는 이유로 재계약의 문턱을 넘지 못한 학교 교무행정사 오세연씨나, 연구자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월 16만6,000원꼴의 장학금만 받고 일한 교육조교 구슬아씨도 있다. 이들이 애써 덤덤하게 풀어내는 경험담을 듣다 보면 부당한 취급을 받을 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책을 펼치며 조돈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대표는 이렇게 쓴다. “비정규직 노동자 한 분 한 분의 이야기가 모이면 우리 시대의 기록이 된다.” 이들의 수기는 구체적인 통계나 정치적인 분석 없이도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실패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간 숱하게 보도되면서도 기사나 인터뷰 속에서 ‘필터링’됐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접해보길. 더는 놀라울 게 없을 것 같던 비정규직 노동의 실태를 다시금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