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민(30·가명)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로봇공학자를 꿈꿨다. 어릴 때 지하철에서 질 낮은 의족을 착용한 채 불편한 걸음으로 구걸하는 장애인을 만났다. 그 모습이 큰 충격이었던 '어린 김규민'은 장애인용 로봇 의족·의수를 개발하고 싶었단다. 그 꿈을 이루려 'SKY'라고 불리는 상위권 대학 공대에 진학했지만,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친 뒤 돌연 진로를 바꿨다. 김씨는 다시 수능을 봐서 2021년 스물 여덟 늦은 나이에 서울 소재 의대에 입학했다.
고교 시절 선택지에 의대는 없었다. 의대는 사람 살리겠다는 사명감이 있어야 가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바뀌었다. 먼저 직장생활 하는 친구들을 보니 대기업 다니며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긴 어려워 보였단다. 그래서 결론은 '의사'였다. 수련 과정에선 격무에 시달리겠지만, 전문의를 따면 개원 후 고소득을 누리며 자기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그렇게 한국은 미래의 유능한 로봇공학자 한 명을 또다시 '의사 캐슬'에 빼앗겼다.
이곳은 모두가 의대 가고 싶어하는 나라, 의사 면허가 모든 전문직을 누르고 천하통일을 달성한 나라, 대한민국이다. 대학 정시 배치표를 보면 서울대 의대부터 전국 의대를 한 바퀴 다 돌고서야 서울대 공대가 뒤따르고, 상위권 대학 비의대 학생들 중엔 의대를 가려고 반수나 자퇴를 택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다. 그래서 수학능력시험은 최상위권이 등수대로 의대에 들어가는 사실상의 '의사고시'로 전락했다.
왜 이렇게 부모와 학생들이 의대 하나에 목맨 세상이 된 걸까. 입시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특권 중산층이 의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①고소득에 ②정년 없고 ③사회적 지위와 존경까지 누리며 ④의대만 가면 면허가 보장돼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1960·70·80년대에도 의대엔 우수한 학생들이 갔지만, 모든 상위권 학생이 의대에 가진 않았다. 의대는 1995학년도 정시모집 배치표에서 상위 20개 학과에 대거 진입했다. 종로학원 자료에 따르면, 계속 1위를 지켰던 서울대 물리학과가 이 해에 서울대 의예과에 자리를 내줬다. 그간 상위 20위 안에 든 건 서울대와 연세대의 의약계열뿐이었지만, 수도권 소재 의대 (고려대 경희대 가톨릭대 아주대 한양대 이화여대)도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김영삼 정부 시절 의대를 대거 신설하고 정원을 늘린 효과로 풀이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의대 선호 현상은 더 심해진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월급쟁이의 시대가 가고 라이센스(면허)의 전성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2000학년도엔 배치표 1위부터 7위까지 모두 의대가 차지했다. SKY 비의대 인기 학과에 눌려 있던 지방 의대의 위상도 수직상승했다.
이후 의대 선호 현상은 더 공고해졌다. 2005·2010학년도는 1위부터 20위 모두 ‘의치한약’(의대·치대·한의대·약대)이 차지했다. 2015·2020학년도, 지난해엔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컴퓨터공학과 등이 간신히 이름을 내밀었고, 올해는 배치표 1~20위 전체를 다시 의대가 점령했다.
앞으로도 이런 구도가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의대 선호 현상은 점점 더 심해지는 중이다. 상위권 대학 비의대 진학생이 다시 수능을 봐서 의대에 도전하는 사례도 늘어, 종로학원 자료에 따르면 SKY 자연계열 자퇴·미등록학생은 2021년 1,421명으로, 2019년(893명)에 비해 59.1% 증가했다. 홍유석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은 "공대에 온 학생들은 대부분 의대 지원이 가능한 최상위권이기에 이탈 현상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더 심해진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늦깎이 의대 지원자들은 대부분 수능을 위주로 선발하는 정시모집에 지원한다. 서울 소재 의대 본과 4학년 김은주(28·가명)씨도 4수를 해서 정시로 의대에 왔다. 김씨는 "나는 애초에 의대가 목표여서 계속 도전한 케이스지만, 다른 과에 다니다 군대 제대 후 온 사람들도 흔하고, 대기업에 다니다 온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의대에 입학한 장수생(여러 차례 대입에 응시한 지원자) 비율도 급증하고 있다. 2020년 29.0%였던 3수생 이상 비율은 지난해 41.9%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4수생 이상 비율(9.2%→17.1%)도 증가했다.(민형배 의원실)
의사가 각광받는 이유는 고소득 직종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의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의사의 평균 연봉은 2억3,069만 원. 같은 해 통계청이 발표한 일반 정규직 근로자의 연봉(4,431만 원)의 5배가 넘는다. 임금 상승률도 높다. 일반 근로자의 소득은 2010년에 비해 37.95% 올랐지만 같은 기간 의사 소득은 66.71% 상승했다.
의사 소득이 워낙 높다 보니 이공계 박사급 연구원이나 개발자 소득도 명함을 못 내미는 수준이다. 회사에서 퇴직 때까지 거둘 수 있는 총 기대소득을 묻는 질문에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임원을 달아 연봉이 오른다고 해도 총 연봉은 58억 정도"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40대 대기업 부장은 "(저의 경우를) 대략 계산해 보면 임원이 안 된다면 30억 대, 임원이 되면 40억 대 정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2020년 기준 개원한 전문의의 평균 연봉은 3억137만 원. 개원해서 25년 일한다고 가정하면 소득이 오르지 않아도 총 기대소득은 75억 원을 넘는다. 늦깎이 의대생 김은주씨는 "애초에 그냥 돈 많이 벌려고 온 의대 애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의사는 정년이 없기 때문에, 의사와 대기업 직원이 누릴 수 있는 노년의 삶의 질 차이는 더 벌어지게 된다. 독점적 면허를 가진 의사는 60세를 넘겨서도 일자리를 찾기 어렵지 않지만, 대기업은 정년까지 가기도 쉽지 않다. 40대 개발자 A씨는 "우리는 나이가 들면 고민이 깊어진다"며 "의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노하우가 쌓이지만, 개발자는 저연차들에게도 코딩 실력은 뒤처질 수 있어 회사 내 입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의사는 면허 유효기간이 없어 대학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해도 개원가로 나오거나 중소형 병원에 재취업해 의사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진행한 '2020 전국의사조사'에 따르면 의사의 평균 은퇴 연령은 65.2세, 본인이 생각하는 적정 은퇴 연령은 67.7세로 나타났다. 은퇴 의사와 60세 이상 현역 의사의 59%는 "은퇴 후에도 의사 일을 계속할 생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일단 입학만 하면 의사면허가 사실상 보장되는 것도 장점이다. 의사 국가고시를 합격률은 94% 정도로 대부분 통과한다. 입학이 곧 면허를 보장한다는 점은 많은 20대들을 유혹하고 있다. 올해 변호사시험에 응시한 이서현(26·가명)씨는 "변호사는 로스쿨에 들어가도 경쟁이 치열하고, 변시 합격률도 50% 안팎이라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차라리 의사를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주변에 의사 친구들이 많아 졸업 후 의대 진학을 고민했다던 박지훈(27·가명) 씨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의대 진학만큼 보상이 확실한 노력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공대에서 의대로 갈아탄 당사자지만, 막상 김규민씨도 의대 쏠림 현상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김씨는 "공대에 갔던 인재들이 의약계열로 돌아선다는 사실 자체가 과학자와 공학자에 대한 한국의 처우를 대변한다고 본다"며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땐 공학 전공이라면 다들 '대단하다' '존경한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한국은 그런 자부심도 없다"고 말했다. "예전엔 취업이라도 잘 됐는데 요즘은 그것도 아니니 공학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은 더 떨어지는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이공계 교수들도 의대로 인재를 빼앗기는 현상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홍유석 서울대 공대 학장은 "의대에 간다는 학생과 면담을 하는데, '의대에선 꼴찌해도 연봉이 3억'이라는 학생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더라"며 "기업들도 우수한 공학 인재를 원한다면 그에 맞게 보상을 하고, 사회에서도 대우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공학은 과학연구를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서비스를 만드는, 사회에 꼭 필요한 학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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