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첨단산업 육성하겠다"지만 이공계 인재들 빨아들이는 의대 '블랙홀'

입력
2023.04.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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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 SWOT 보고서]
④실효성 있는 인재 양성 정책의 실마리
지방 의·약대 경쟁률↑… 정부 지원받는 첨단학과는 0점대 수두룩
"이공계 평균 연봉 높여야 지원 늘 것"… 정부는 대책 고심만

편집자주

유보통합부터 대학개혁까지. 정부가 교육의 틀을 다시 짜겠다는 계획을 밝힌 지 100일이 지났습니다. 한국일보는 교육계 전문가 13명에게 이번 정부 교육개혁 정책의 기대효과와 부작용, 위기와 기회 요인(SWOT)을 물었습니다. 공정한 출발선은 가능할지, 잠자는 교실은 일어날지, 대학을 위기에서 구해낼 방법은 무엇일지 5회에 걸쳐 분석합니다.


이른바 'SKY 대학(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하던 A(23)씨는 지난해 지방 의대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의 꿈은 의사와 거리가 멀었다. 부모의 의대 진학 권유에도 수학과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차선으로 공대에 진학했다.

그렇게 2년을 공대생으로 지낸 그는 'SKY 대학' 간판과 어릴 적 꿈 대신 결국 의사의 길을 택했다. A씨가 스스로 진로를 바꾼 건 2년간 공대 선배들의 고충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A씨는 "선배들 중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에 가거나,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어렵게 취업을 준비하느니 전문직인 의사가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A씨는 3개월간 공부해서 수능을 다시 치렀고, 지역인재 특별전형을 통해 지방 의대에 합격했다. 그는 "SKY 간판도, 서울 생활도 포기하고 지방 의대에 왔지만 미래를 위해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의대 동기가 40명인데 그중 절반가량은 수도권에서 온 n수생"이라고 말했다.

'소멸 위기' 지방대마저 '상한가'… 우수 인재 빨아들이는 의대

정부는 규제 혁신과 재정 지원을 통해 첨단 분야 인재 양성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현실에선 우수 이공계 학생들이 대거 의대로 이탈하고 있다. 대부분의 의학전문대학원이 폐지돼 수험생의 의대 지원폭이 넓어졌고, 특히 2023학년도부터 지방 의대는 신입생의 최소 40%(강원·제주 20%)를 지역인재로 선발하도록 하면서 의대 열풍은 더 거세졌다.

이 때문에 '소멸 위기'를 겪는 지방 사립대도 의약학계열의 인기만큼은 치솟고 있다. 이투스 교육평가연구소에 따르면 고신대(부산) 의예과 정시모집 일반전형 경쟁률은 2021년 13.3대 1에서 올해 32.7대 1로, 대구가톨릭대는 12.5대 1에서 28.77대 1로 상승했다. 주요 약대의 올해 경쟁률 역시 계명대(대구) 68.8대 1, 대구가톨릭대 19.6대 1, 인제대(경남 김해) 15.7대 1, 우석대 9.3대 1 등으로 높았다.

의대 입학생 중 상당수는 이공계 우수 인재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자퇴·미등록 학생 1,874명 중 75.8%가 자연계열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의약계열로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2020~22년 18개 의대 정시 합격자 79%는 'n수생'이었다.


공대 대신 의대 택한 3가지 이유

수험생들은 공대를 떠나 의대로 옮기게 된 이유로 크게 3가지를 꼽는다. ①공대는 'SKY 대학'이라도 학점이 안 좋으면 취업이 어렵지만 의대는 지방대라도 취업 걱정이 없다. ②공대는 자격증, 영어 성적, 인턴 등 대외활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지만 의대는 학과 공부에만 전념해도 문제없다. ③공대는 고소득이 보장되려면 석·박사가 필수인데 의대는 비인기 전공을 하더라도 고소득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포항공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B(25)씨는 "학부 입학생 중 40%는 의약계열로 빠진다"며 "학부 졸업 후 의약계열로 재입학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서울 상위권 대학 공대에 다니다 서울 지역 의대에 재입학한 C씨는 "수입의 하한선이 높은 의사의 직업적 특성이 의대 선호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며 "첨단분야 인재를 육성하려면 업계의 평균 연봉을 높이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해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지원받고도 기억에서 잊힌 첨단 학과… 0점대 경쟁률 수두룩

정부가 지원한 첨단산업 분야는 외면받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한 우수 인재를 육성하겠다며 2016년 정부가 시행한 프라임 사업(산업 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대학) 관련 학과들은 사업 초기 반짝 인기를 얻다가 금세 잊혔다. 경북 K대 항공분야 수시·정시 경쟁률은 각각 2017학년도 7.7대 1, 8.6대 1에서 2023학년도 2.9대 1, 1.4대 1로 떨어졌다. 광주 H대 미래형 자동차·전기공학, 부산 D대 조선해양시스템·스마트모바일·기계공학, 전남 D대 에너지신산업·전기차 분야의 올해 정시 경쟁률은 0.3대 1이었다. 2022학년도엔 프라임 사업에 선정된 21개 대학 중 9곳이 0점대 경쟁률을 기록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첨단분야 인재 양성 정책 역시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으려면 과거 정책의 실패 원인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준 기자
김종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