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명의 식구가 모여 사는 집이 있다면 어떨까. 결혼해 자녀를 둔 네 자매는 대가족이 어떤 집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며 살아갈지에 대한 답으로, 서울 근교의 한적한 동네에 4층 상가주택을 지었다. 1층엔 가게를, 2층부터는 그동안 그려왔던 각자의 집을 만들어 일상을 따로 또 같이 나누기로 한 것. 정수정(51)·향(48)·신아(45)·신옥(42), 정씨 자매가 육아와 교류를 위해 지은 '다정가'(대지면적 262㎡, 연면적 391.54㎡) 얘기다. "한 지붕 아래 다양한 정씨들의 집이 있어요. 가족 중에 '정'씨 성이 가장 많기도 하고, 언제까지나 다정한 마음이 오가는 집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지었답니다."
경기 파주시 동패동.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처럼 서 있는 새하얀 박공 집에는 네 자매가 각자의 남편, 자녀들과 일 년째 살고 있다. 1층엔 가족실과 한 부부가 운영하는 목공방을 갖추고, 2층부터 세 개 층, 다락에 각 가정의 색깔이 묻어나는 주거 공간을 들였다. 수정씨는 "네 자매가 같이 살다가 한 명씩 결혼해 분가한 지 15년 만에 다시 모였다"며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들을 함께 잘 키우고 싶은 고민이 녹아든 집"이라고 소개했다.
다정가의 시작은 코로나19가 한창 유행이던 3년 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좁은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갇혀 지내려니 몸도 마음도 지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파주에 살던 둘째 언니네를 찾아 동네를 산책하다 우연히 집 터를 봤어요." 언니 수정씨와 막내 동생 신옥씨가 발견한 상가주택 부지는 아파트를 벗어나 주택살이를 하고 싶은 오랜 열망에 불을 댕겼다. "부지 뒤편으로 다양한 체육시설이 있었고, 동네가 조용하고 아늑했어요. 멀리 보이는 주택가의 낮은 스카이라인과 공원의 푸릇한 풍경도 아름다웠고요."
4층 규모의 집에 1층엔 가족실을, 2층부터는 각 가족의 주거공간을 만드는 그림을 그려본 네 자매는 처음 땅을 본 날로부터 일주일 만에 각자의 남편을 포함해 건축주 8명 전원의 동의를 받아, 땅을 샀다. 스무 살에 상경해 함께 살던 네 자매가 짝을 만나 흩어진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한 집에서 십 년을 지지고 볶았고 남편들도 연애시절부터 오랜 기간 가족처럼 알고 지내던 사이라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는 수정씨의 말에 향씨가 덧붙였다. "말은 안 했지만 언젠가 같이 모여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그런 집을 짓는다면 한창 자라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지금이 적기다 싶었어요."
네 가족의 인생 집이라는 목표 아래 설계와 시공에 세세한 정성을 들였고, 그로부터 일년 뒤 막연한 그림은 현실이 됐다. 공동 육아를 꿈꾸며 지은 집에 가족실은 필수 공간이었을 터. 공방 뒤편에 공간을 마련해 10인용 테이블과 창가 테이블을 놓고, 각 가족의 일정을 공유하는 게시판을 붙인 아담한 아지트를 만들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동부터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자녀들이 아침 저녁으로 모이는 공간이자 가족 회의를 열거나 빔 프로젝트로 영화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장소다. 잔디 공원으로 활짝 열린 데크와 연결돼 홈파티를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라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 덕분에 집이 조용할 틈이 없어요. 재산으로서 집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답은 간단해요."
2층부터는 온전히 각자 가족을 위한 공간이 시작된다. 설계를 맡은 황은·전상규 건축가(보편적인건축사사무소 소장)가 특히 공을 들인 부분이다. 황 소장은 "육아로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는 가족인 만큼 그 외 시간에 숨어있듯 누릴 수 있는 각자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며 "각 가정의 로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한 집은 한 층 전체를 쓰고, 다른 집은 한 층의 일부, 나머지 두 집은 복층 구조로 설계해 다양한 형태가 됐다"고 설명했다.
같은 구조의 집이 하나도 없는 맞춤 설계이다 보니 각 세대가 경험하는 재미도 다르다. 네 집 가운데 세 집은 공원으로 활짝 열린 거실공간을 갖춰 햇빛과 전망을 확보했는데 레벨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한 층을 전부 쓰는 신옥씨의 집은 자기 집만의 널찍한 테라스 공간과 남편의 로망이었던 벽난로를 설치해 여유를 즐기는가 하면 세 층을 관통한 신아씨의 집에서는 가정 집에서 경험하기 힘든 높은 층고, 계단으로 이어지는 수직 동선을 누린다. 두 집의 다락 사이에 생겨난 자투리 옥상 공간은 1층 공용 공간과는 달리 외부의 시선이 차단돼 삼삼오오 프라이빗한 시간을 보내거나 여름철엔 풀장을 놓아 아이들의 놀이터로 쓴다. "외부는 한 지붕 아래 같은 집인 듯한 단순하고 통일된 디자인을 의도했다면 내부는 세대별로 디테일하게 풀었어요. 각자의 공간에 방문했을 때 새롭고 지루하지 않은 공간이었으면 했죠."
여기에 이름처럼 안팎이 정감있는 집이라는 설명이 따라왔다. 황 소장은 "외부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는 재료인 붉은 벽돌로 마감해 주택의 따뜻한 감성을 얹었다"며 "기본적으로 패시브 창호와 일사를 차단할 수 있는 외부 전동 블라인드, 전열 교환기 같은 패시브 건축 요소를 들인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집"이라고 덧붙였다.
어른 8명과 아이 7명이 부대끼는 한 집 살이. 어디서도 본 적 없던 독특한 주거 방식을 실험 중인 자매들은 "각자의 집에 따로 살 때와 비교하면 불편한 점이 있지만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해할 만큼 일상은 풍요로워졌다"고 입을 모았다. 원래도 친남매처럼 지냈던 아이들은 더욱 가까워졌고, 어른들 역시 운동에, 취미활동에, 때론 진득하게 자기 시간에 몰입하면서 곳곳에서 자기 방식으로 집에 스며들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먼 미래, 라이프사이클의 변화에 따른 이 집의 미래도 상상해보게 됐다고.
"고만고만한 나이대 남녀가 모여있으니 나이가 들면 양로원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요. 1층에 공용 식당과 카페를 두고 말이죠. 양로원치고는 좀 시끄럽긴 하겠네요." 청춘을 함께 보내고 중년이 되기까지 쌓은 끈끈한 유대를 바탕으로 지은 집에서 자매들은 노후마저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15명 대가족이 모인 집이라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건축주 네 자매. 앞으로 해야 할, 예정된 일들을 설레는 표정으로 전하는 이들의 표정에서 곧 일어날 이 가족만의 소란이 즐겁게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