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전시장의 백색 벽면만큼이나 하얗게 빛나는 풍경화 한 점이 걸려 있다. 캔버스 속에는 흰색 이층집이 햇볕을 정면으로 받고 서 있다. 집은 푸른 하늘과 어두운 숲을 뒤편에 두고 있어 색이 더욱 도드라진다. 테라스에는 중년 여성과 젊은 여성이 서로 멀찍이 앉았다. 이 작품은 현대인들의 고독을 사실적인 화풍(리얼리즘)으로 화폭에 담아내 명성을 얻은 화가이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이 층에 내리는 햇빛’(1960년). 호퍼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노란색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햇빛을 흰색만으로 그리려 시도했다. 그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밝힌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호퍼’ 하면 떠오르는 정서인 ‘고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대도시 풍경도, 어두운 밤거리도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기억에 상상을 더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리얼리즘 화풍을 구축한 호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사실적 풍경을 통해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를 두 연령층의 대립 또는 여성의 인생에 대한 비유로 해석하는 분석도 있다.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현실 너머의 상징적 세계까지 그려낸 거장의 면모를 확인하는 전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이달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열린다.
그가 예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인 프랑스 파리 체류 시기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 나간 시기,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풍경화를 그리던 시기까지 작가의 생애를 7개 부문으로 나눠서 소개한다. 드로잉과 판화, 유화, 수채화 등 작품 160여 점과 호퍼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한데 모은 산본 호퍼 아카이브 자료 110여 점이 전시됐다. '철길의 석양'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 첫 공개로, 작품 대부분이 이번 전시를 함께 기획한 뉴욕 휘트니미술관 소장품이다. 자료들 가운데는 호퍼가 생업으로 삼았던 일러스트레이션(삽화) 작업물들도 포함돼 있어 그의 작품과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호퍼하면 환기되는 소외의 정서가 강렬히 드러나는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호퍼의 화업 발전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호퍼의 아내이자 그를 성공으로 이끈 동반자였던 화가 조세핀 니비슨 호퍼(1883~1968)를 조명하는 공간도 마련됐다.
호퍼는 ‘미국의 모습을 다룬 화가’, ‘리얼리즘 회화’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복제한 것이 아니다. 1930년대 말 이후에는 기억을 바탕으로 상상을 덧댄 작품, 상징적 의미가 숨어 있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오전 7시’(1948년)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호퍼의 고향인 뉴욕주 나이액에 있는 주류 밀매 업소를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호퍼는 이 작품을 금주령이 풀린 지 15년 후인 1948년, 매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의 트루로 스튜디오에서 완성했다.
호퍼의 풍경화는 정말로 ‘풍경’만을 그린 풍경화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예컨대 자연과 문명의 대조는 호퍼가 오랫동안 천착한 주제다. 실제로 호퍼의 그림에는 집, 길, 철도 등의 인공물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들은 대체로 자연과 대비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인 ‘콥의 헛간과 떨어져 있는 먼 집들’(1930~1933)은 녹색 들판에 솟아오른 붉은 헛간을 그린 작품이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교수를 지낸 롤프 귄터 레너는 저서 ‘에드워드 호퍼’에서 콥의 헛간을 그린 다른 작품을 두고 그것이 목가적 풍경화가 아니라 오히려 ‘날카로운 사회 비판’일 수 있다고 비평한다. 1920년대 미국의 경제 침체기에 농부들이 고향을 떠나 버리면서 넓은 땅이 휴한지로 버려지던 상황이 그림에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콥의 헛간…' 옆에 함께 전시된 '벌리 콥의 집, 사우스트루로'(1930~1933년)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집무실에 걸렸던 작품이다.
호퍼는 빛과 그림자를 대담하게 사용하는 화풍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유명한 에칭(판화) 작품 ‘밤의 그림자’(1921년)를 비롯해 뉴욕(MoMA·뉴욕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밤의 창문’(1928년) 등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밤의 그림자’는 빛과 그림자를 극적으로 대비시킨 작품이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대로를 나무 그림자가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가운데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의 모습이 영화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호퍼가 회화를 그리기 이전에 연습한 드로잉들도 만날 수 있는데 습작마다 색깔에 대한 설명이 빼곡히 적혀 있어 호퍼가 사전에 그림을 계획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거장이 남긴 말이다. “아마도 나는 인간성이 모자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집의 벽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그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