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동이 트기도 전인 오전 5시 30분. 서울 양천구 이대목동병원 편의점 앞에서 만난 박대준(37) 간담췌외과 교수는 우유 한 팩을 들고 있었다. 점심은 보통 거르고, 저녁 한 끼만 제대로 챙겨 먹는 그에게 우유는 오전을 버틸 소중한 양식이다.
"식사는 안 하세요?"(기자)
"밥 먹으면 졸려서요."(박 교수)
아침 댓바람부터 발표 준비와 서류 작업을 하다 보면, 회진 돌 시간이 온다. 오전 7시 외과 의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그를 맞이하는 후배 의사는 없다. 이 병원 외과 전공의(레지던트)는 6명 정원에 1명뿐이라서다.
박 교수는 후학이 끊긴 현실에 "꽤나 상실감이 크다"고 말했다. "전공의 끝나고 전임의(펠로우)를 선택할 때 은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걸어온 길을 똑같이 따라오는 후배를 보면, 그래도 내가 잘못된 길을 오지는 않았구나 싶다'고요. 때론 제가 선택한 길(외과)이 좋은 길이 아닌가 회의감이 들어요. 그래도 올해 새로 들어온 전공의 1명이 있어서 가르쳐 주고 할 때면 힘이 납니다."
7시 반. 박 교수는 축지법 쓰듯 성큼성큼 4개 층을 빠르게 오갔다. 8시가 되기 전 환자 8명의 회진을 마쳐야 하기 때문. 그 뒤 오전에는 11명 외래 환자 예약이, 오후부터는 예정된 수술 4건이 기다리고 있다. 이날은 외래를 보던 중 담낭염 의심 응급환자가 들어와 그 수술도 책임져야 했다.
사실 박 교수에게 이날은 '새로운 하루'가 아니라 '전날의 연장'이다. 전날인 11일 오전 8시부터 시작된 업무는 야간 당직, 회진, 외래, 응급수술(1건), 예정 수술(4건) 등을 지나 12일 오후 6시 37분에 끝났다. 박 교수는 출근 후 약 '34시간 37분'만에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딱히 바쁘지 않은, 아주 평이한 스케줄"이란다.
같은 달 18일에 만난 이시운(40)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이틀 전부터 병원에서 숙식 중이라며 힘 빠지게 웃었다. 출퇴근 시간을 아껴 잠을 더 자려고 한다는 그의 평균 수면 시간은 하루 네댓 시간. 이 교수는 뇌출혈, 뇌경색 등 뇌혈관에 문제가 생긴 환자 두개골을 열고 고난도 수술을 해내는 '뇌혈관외과 전문의'다. 대한신경외과학회에 따르면 전체 신경외과 전문의는 약 3,000명이지만 이 교수처럼 개두술에 능숙한 뇌혈관외과 전문의는 4% 남짓인 133명뿐이다.
"다른 직업을 한다면 모를까, 다시 의사가 되어 전공을 택한대도 뇌혈관 수술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시운 교수. 그렇게 사명감과 자부심 넘치는 그에게도 올해 초 위기가 찾아왔단다. 천직을 버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작년 말에 과로하다 한쪽 눈이 일시적으로 안 보이는 일이 있었어요. 아내에게도 꿈이 있는데 육아나 집안 모든 일을 전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다른 일을 하면 가족들과 좀 더 행복하게 살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밤에 응급수술이 생겨도 교통비 5만 원이 당직비 전부에요. 병원을 나가서 피부·미용 일을 하면 가족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죠."
그런 결심에 "정말 나가겠다"는 얘기를 주변에 했지만, 나가지 말라고 잡는 사람 하나 없었다고 한다. 지인들은 고된 일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마음을 다잡은 것은 '환자를 살릴 때 느끼는 보람' 때문이었다.
"환자분들 치료하고 보람을 느끼는 게 내 가장 큰 동력인데, 나가서 돈 많이 벌면 진짜 행복할까? 내 가족은 행복할 수 있어도, 나 스스로 행복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결국에는 안 나가고 좀만 더 버텨보자, 다만 내 삶도 챙겨가며 해보자 마음먹고 다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 교수의 연구실 책상 앞에는 환자와 그 가족이 써준 편지들이 붙어있다. 누군가의 부모, 어떤 이의 자녀 목숨을 구하고 받은 그 영광의 훈장들을 보며 그는 버티고 있었다.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교수님처럼 멋진 어른이 될게요. 사랑해요. ○○○이가♥" "교수님이 우리 아빠 살려주신 덕분에 제가 다시 행복해졌어요. 교수님을 항상 기억할게요."
'특별한' 대학병원 의사들의 인간미 넘치는 '평범한' 일상을 그려 호평을 받았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 주인공 5인방인 '99즈'(서울대 의대 99학번)의 전문 분야는 각각 흉부외과(김준완) 소아외과(안정원) 산부인과(양석형) 신경외과(채송화) 간담췌외과(이익준)다. 공교롭게도 모두 '내외산소흉신'(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신경외과)에 해당하는 바이탈과(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 분야)다. 박대준 교수와 이시운 교수는 '현실 속 99즈'다.
그러나 의사의 감동적 헌신과 환자의 자발적 협조, 까칠했던 보호자의 각성이 이어지던 '슬의생' 드라마의 따스함과 뽀샤시함과 달리, 현실의 바이탈과는 무섭고도 위험한 '기피과의 총집합'이다. '고되다, 돈은 덜 번다, 위험하다, 자유시간 없다'는 게 바이탈과에 대한 젊은 의사들의 보편적 인식이다.
너도나도 의사가 되려 아우성인 의대 쏠림 현상이 극에 달했지만 정작 사람 살리는 필수의료 분야에서는 '99즈' 뒤를 이을 젊은 의료인을 찾지 못해 난리다. 일부 세부 분과는 아예 '대가 끊길 위기'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단적인 예가 '슬의생' 속 안정원(유연석 분)이 교수를 맡았던 소아외과다. 외과 전문의를 딴 뒤 2년 이상 추가로 수련해야 하는 분과로, 선천성 기형·소아암 같은 고난도 소아수술을 전문으로 한다. 그런데 현실 속 소아외과 전문의 중엔 안정원처럼 젊은 의사가 거의 없다. 대한소아외과학회 소속 정회원 74명 중 65세가 넘는 의사가 31명이다. 실제 활동 의사는 준회원을 합쳐도 50명 정도다.
'새로운 피' 유입은 없다시피하다. 2014년 이래 줄곧 한 자릿수대를 면치 못한 분과 응시자 수는 2021년 '0명'을 찍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소아외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은 31곳뿐이다.
'기피과 문제'는 2000년대 초부터 거론됐지만, 일반인이 체감할 정도의 '의료 공백' 사건은 최근 연달아 발생했다. 지난해 7월 병원 내 뇌혈관외과 전문의 2명이 공교롭게 자리를 비운 사이 발생했던 아산병원 간호사 뇌출혈 사망 사건, 올해 3월 '2시간 응급실 뺑뺑이' 끝에 수술을 받지 못해 숨진 대구 청소년 사건, 소아청소년과 개원의 단체의 폐과 선언 등이다.
젊은 의사는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재영'(정형외과 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등 'QOL'(삶의 질·워라밸을 뜻하는 의사 집단 내 통용어)이 보장되거나 수입이 많은 과로 몰리고, 의사들조차 "참의사 찾기 힘든 시대"라고 자조하는 2023년. 바이탈 의사는 "비합리적 선택을 한 바보"라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받으며 △고강도 노동 △상대적으로 낮은 수입 △의료소송 등 책임의 위협을 견디고 있다.
왜 이들은 '미련하게' 바이탈과에 남았을까. 계속해서 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 '법은 주80시간만 일하라는데... 실제론 120시간을 찍어요'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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