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기념관이 챙겨야 할 사료들

입력
2023.04.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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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이승만 하야 성명

1960년 4월 26일 오전 10시 30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원문대로 그는 당일까지도 자신의 “국민이 원하면”,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등의 단서로 빠져나갈 구멍을 모색했다. 그는 4·19 이후 이어진 일련의 전국적 시위를 국민의 진의라 수긍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그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고 불과 한 달 뒤인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 1965년 7월 19일 심장질환으로 숨졌다.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 그가 이룬 공과 과의 평가는 물론 엇갈릴 수 있다. 해방 후 형성된 복잡한 정치-이념적 세력집단과의 대립 과정에서 그가 직간접적으로 행한 협잡과 폭력 역시, 권력투쟁의 보편적 속성쯤으로 치부할 수 있고, 다른 권력집단의 행태 역시 그리 신사적이진 않았다는 점에서 최종 승자인 그에게 편파적인 비난이 집중된 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1948년 정부수립 이후 그와 자유당 정권이 행한 권위주의 독재와 노골적인 선거 부정, 반공을 빌미로 자행한 진보당 사건 등 사법 살인과 일련의 양민 학살(보도연맹사건, 제주4·3사건 등), 군납 비리로 최대 9만 명의 징집병을 굶거나 얼어 죽게 하고 20여 만 명에게 동상 후유증을 안긴 한국전쟁 전시 국민방위군 사건까지 묻힐 수는 없다.

그는 국민에게 권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피해의식과 불신을 안긴 집권자였다. 국가보훈처가 이승만기념관 건립 예산을 책정했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