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하늘의 봉황의 자리.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 자리 잡은 사찰, 건봉사(乾鳳寺)의 뜻이다. 이 절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 초기에 아도화상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하지만, 오늘날 절의 이름은 고려말 나옹화상이 개칭하여 전하는 것이다. 절의 연원이 성스럽고, 금강산을 비롯한 태백산하의 중심 사찰로서 역사가 화려하기도 하지만,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불교사뿐 아니라 만해(萬海) 스님이 정리한 대로 우리 사회사에도 의미가 특별하지만, 그동안 발굴을 토대로 느지막하게 올해 2월에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아마도 그간 여러 차례 재난으로 훼손되었던 탓에 건축이나 유물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재난의 역사는 바로 민족사의 어려운 고비들을 말하는 것이기에 역사적인 현장으로서 가슴을 여미게 한다. 또한 그 위치를 보면 우리 미래를 위한 염원의 절이자 유적지임이 틀림없다.
요즘 나의 관심사인 '한국동란 동안의 문화유산 파괴 현장'도 볼 겸 봄바람을 따라 길을 나섰다. 고고학은 고대사회 유물이나 유적이 가지는 역사적 사실의 가치를 구하는 것 말고도, 문화재에 담긴 고대인의 지혜에서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찾는 일도 포함한다. 화려하면서도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건봉사의 매력이 연둣빛이 솟아오르는 봄날에 내 발길을 이끈 것이다.
고성 읍내에서 금강산의 남쪽 자락인 건봉산 방향으로 조금 가니 아직 벚꽃이 화려한 길이 나오는데, 인적이 없으니 무협지의 한 장면인 듯한 착각이 든다. 언덕이 시작되는 입구, 보물이 된 홍예석교 능파교 아래에도 분홍 진달래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산사 입구에는 훤칠한 소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고 그 뒤로 마당이 널찍이 펼쳐진다. 마당 끝에는 한국동란 때 절이 다 불탔어도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는 불이문(不二 門)이 덩그렇게 서서 방문객을 맞이 한다. ‘금강산건봉사’라고 하면 깊은 산에 있을 듯 싶지만,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국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골짜기에 완만한 사면에 펼쳐져 있다. 멀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은 한국동란 이후에는 민통선 지역으로 오랫동안 일반인 출입이 힘들었던 탓도 있었으리라.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높은 준령 태백산맥이 이어지고, 그 산맥 속에 금강산이나 설악산 같은 아름다운 산들이 줄이어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금강산은 고래로부터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는 이승의 번뇌를 끊은 이상향, 즉 극락정토로 믿었다. 신라 경덕왕대(742∼765)에 발징화상(發徵和尙)과 1,800여 명의 신도들의 ‘살아서 복을 누리고 죽어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서 성불을 비는’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가 건봉사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그런 깊은 정서와 염원이 있기 때문 아닐까?
또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핍박하던 조선시대에도 세조(재위 1455~1468)가 건봉사에 행차해 머물고 난 뒤 원찰로 만들고, 조선왕조 내내 왕이나 왕족들이 이 절에 공을 들인 것도 같은 이유일 듯 싶다. 그 염원의 흐름은 이제 지난해에 새롭게 시작되어 2049년까지 27년 이상 지속될 제7차 만일염불회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절 입구 마당의 화사하게 꽃 핀 오래된 벚나무 아래에는 일제에 의해 깨어진 사명대사 비석들이 열을 이루고 서 있다. 바로 그 뒤에 사명대사와의 인연을 보여주는 전시관 건물이 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사명당이 이곳에서 승병을 일으켰고, 이 절의 적멸보궁(寂滅寶宮)에 보관된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대사에 의해 이곳에 봉안된 것이다. 원래 양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진신사리를 왜적이 훔쳐간 것인데,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이후 포로와 함께 돌려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른 설로는, 당시 왜군에 포로로 잡혀갔던 백옥거사가 다시 훔쳐서 가지고 온 것을 사명대사가 나누어 이곳에 보낸 것이란다. 이곳에 보낸 사리 중에는 부처님 진신치아사리가 있는데 이곳 외에는 스리랑카에만 있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스승인 서산대사의 '통도사에 두는 것이 좋다'는 말씀에도 굳이 이곳으로 치아사리를 보내 모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절에서 염불하여 극락정토에 이르게 하겠다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탈취된 사리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고 나아가 금강산 자락의 건봉사에 모셔졌다는 사실이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탈취된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전문가들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문화유산의 파괴는 그 민족의 문화정체성을 잃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불이문을 지나 큼직한 박석이 깔린 길을 오르면 왼쪽에는 극락전이, 오른쪽에는 멋진 홍예다리 능파교(凌波橋) 건너편에 '금강산건봉사' 간판이 걸린 봉서루가 보이고 그 안쪽으로 대웅전이 있다. 이곳의 가람배치는 가운데 작은 골짜기를 두고, 양쪽으로 각각 극락전과 대웅전을 중심으로 건물들을 배치했다. 전통적인 고대 사찰의 가람배치와는 다르게, 신앙공간보다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생활공간이 큰 비율을 차지한다. 조선시대에도 유점사, 정양사 등 금강산의 절들을 거느리는 강원도 지역의 본사였고 고종(재위 1863∼1907년)대 화재기록에 의하면 거의 3,000칸이 넘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오늘날 보는 풍경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봉서루에 전시된 한국동란 직후의 사진을 보면 불이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의 건물들은 강원문화재연구소(2002년)와 강원고고문화연구원(2008년 이후)이 발굴한 결과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20년 이상이나 진행된 발굴에서 고려시대 유물들이 간혹 드러나기도 하지만, 세조 방문 이후 건립된 대웅전 옆의 어실각 발굴에서는 조선 초기 기와들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들이다. 이 지역을 고구려가 차지했을 시기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고 신라 경덕왕대 발징의 염불회 기록이 보여주는, 엄청나게 큰 가람이 있었을 법한 기대는 전혀 입증되지 않는다. 이 절의 옛날 이름인 도선국사의 서봉사(瑞鳳寺) 흔적이나 건봉사로 개명한 고려말의 나옹선사 흔적도 희미하다. 기록은 분명하지만 고고학적인 증거가 별로 없다. 왜 그럴까? 20년 가까이 이 절터를 발굴한 지현병 강원고고문화연구원장의 아쉬운 한숨 소리가 귓가에 다시 들리는 듯하다.
세조가 거쳐간 이래 이 절은 조선왕실의 원찰로서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 이 절에서 갈라져나온 백담사에 있었던 만해 스님이 정리한 절의 역사를 보면 정말 화려하다. 이곳에 부임한 관리가 조정에 청한 면세나 부역 등의 특혜를 제외하고도 고종대까지 왕실에서 내리는 보물들이 엄청났다. 한국동란으로 불타버렸을 때에도 이미 국보로 지정됐던 금니(金泥)화엄경만 봐도 그렇다. 고종대에 산불에 의해 전소된 이후 당시 최고의 승장(僧匠)건축가였던 침계민열(枕溪敏悅)에 의해 절이 복구된 점도 이 절이 가지는 위상을 말해준다.
그런데, 한국동란으로 완전히 소실된 절의 규모가 800칸을 넘지 않는 것은 왜일까? 발굴에서 드러난 유구에서는 절의 초기, 즉 기록에 있는 신라시대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고종대 화재에 의해 소실된 규모가 그동안 발굴이 이뤄진 한국동란 때 소실된 건물지 규모의 4배에 달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 별도로 오래된 절터가 존재한다는 것일까? 향후 발굴조사에서 풀어야 할 숙제이다.
건물들 사이에 정리된 절터의 주초들이 절의 빈 공간을 말한다. 절의 가장 안쪽에 있는 적멸보궁 아래 작은 연못 옆에도 발굴에서 수습된 석물들이 놓여있다. 불이문 마당 한쪽에 수백년 절의 요리사(料理史)를 간직한 채 가지런히 누워있는 돌절구열은 그 육중함에 우선 시선이 가지만 깊고 매끈한 절구 속을 보니 이 절의 식구 규모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전한다. 이 절에서 서른한 명이 소신(燒身)으로 극락정토로 왕생하였단다. 이 돌절구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금강산을 향해 오는 대중들에게 염불하는 힘을 주었을 것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이곳 건봉사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는 행렬 속에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