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속에 '덩그러니' 공공병원… "저길 버스 타고 어떻게 가나요?"

입력
2023.05.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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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캐슬 '3058': ②투석 환자는 고향에 못 사나요]
지역거점 역할 못하는 지방 공공의료원

편집자주

한국은 의료 가성비가 좋다고 하죠. 아프면 예약 없이 3,000~4,000원에 전문의를 보는 나라,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나 건보 흑자, 일부 의료인의 희생 덕에 양질의 의료를 누렸던 시대도 끝나 갑니다. 지방 병원은 사라지고 목숨 살리는 과엔 지원자가 없는데,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입니다. 의사 위상은 높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의료 효능감은 낮아지는 모순. 문제가 뭘까요? 붕괴 직전에 이른 의료 현장을 살펴보고, 의사도 환자도 살 공존의 길을 찾아봅니다.


고속도로 바로 옆, 산 속에 있는 저 건물이 병원이라고요?

충남 천안의료원을 처음 가는 사람은 그 위치 때문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천안시 삼룡동 취암산 자락, 경부고속도로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병원만 덩그러니 서 있기 때문이다. 북쪽은 국도, 남쪽·서쪽은 고속도로,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인 '외딴 섬'이다. 하도 고속도로 옆에 붙어 있어 반대편(대전 방향)에서 보면 휴게소 건물인가 싶을 정도다. 근처 시설이라곤 약국 2개와 버스정류장 정도가 전부다.

11년 전 현재 자리로 신축 이전한 천안의료원은 구도심 공공의료원이 시설 노후화와 공간 부족 때문에 외곽으로 옮긴 결과, 주이용자의 접근성이 확 떨어져 버린 대표 사례다. 수익 증대보다 주민 건강 증진에 초점을 맞춘 공공병원 특성상 서민이나 저소득층이 많이 이용하는데, 정작 자가용이 아니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천안시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인 서북구 쌍용2동에서 천안의료원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40~60분이 걸리는데, 버스만 두 번 타야 한다. 어르신들이 이용하기 쉽지 않은 병원이다.

산 속 외딴 섬 천안·제주·충주의료원

의료 서비스 질을 측정하는 중요한 평가 요소 중 하나가 '접근성'이다. 생활 반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위급 상황에 빨리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일보가 전국 35개 전체 지방의료원의 접근성을 비교·분석해 본 결과, 공공의료의 핵심 축을 담당해야 할 지방의료원의 상당수는 멀고 험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부가 종합적 기준 없이 지방의료원을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배치한 탓에, 정작 주민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한 병원이 됐다.

본보가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면·동의 행정복지센터에서 지방의료원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봤더니, 천안의료원처럼 외진 곳에 있는 의료원이 많았다. 제주의료원(제주시 아라일동)은 제주 시내에서 한라산 쪽으로 산길을 굽이굽이 타고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삼도1동에서 버스를 타면 49분이 걸린다. 11년 전 계명산 자락으로 옮긴 충북 충주의료원도 접근성이 매우 떨어진다. 충주시 용산동(행정복지센터)에서 간다면 버스를 이용해 45분이 걸리는데,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에 내린 뒤 22분을 걸어야 병원에 도착할 수 있다.

경남 유일 공공병원인 마산의료원은 도심이긴 하지만 한쪽으로 위치가 치우친 경우다. 같은 행정구역인 창원 시가지나 진해 쪽에서 가기가 어렵다. 창원시 상남동에서 대중교통 이용 시 50여 분이 걸리는 거리다. 경북 울진군의료원은 죽변면사무소에서 약 10㎞나 이동해야 하고, 강원 속초의료원도 속초 시가지 북쪽 가장 끝에 치우쳐 있다.

수도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인천의료원(동구 송림동)은 주택가가 아닌 산업단지 한가운데에 있어 찾아오기 번거롭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많이 이용하는 곳이지만 진료비보다 교통비로 훨씬 많은 돈을 써야 한다. 북서쪽에 치우친 경기의료원 수원병원의 접근성도 좋지 못하다.

규모는 작고, 의사 구하긴 어렵고

접근성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환경·시설 개선 사업도 뒤늦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에서 큰 병원이었던 지방의료원은 민간 대형병원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무형 인프라가 뒤처지고 말았다. 작은 규모와 부족한 의료인력 탓에 지역책임의료원의 역할을 맡기에 한계가 있다. 보건복지부 지방의료원 통합공시시스템에 따르면 2021년 12월 기준으로 35개 지방의료원 중 병상이 300개 이상인 곳은 8곳에 불과했다. 서울의료원이 655병상으로 가장 많았고 인천의료원은 329개로 기준을 겨우 넘긴 수준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오랜 기간 의료행정을 연구한 한 의료 전문가는 "웬만한 필수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는 기준이 300병상 이상"이라며 "지방의료원의 경우 병상 수가 워낙 적어 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조승연 인천의료원장은 "정부의 의료원 현대화 사업으로 시설과 장비가 좋아지긴 했지만, 민간 종합병원에 준하는 인프라와 인력을 채우기에는 재정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라며 "규모는 작고 위치는 정주시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누가 오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민간병원 의사 연봉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지만, 공공병원은 예산이 한정적이라 늘 전문의 구인난에 시달려야 한다. 전문의를 확보하지 못해 운영할 수 없는 진료과도 상당하다. 개설 진료과가 20개 이상인 의료원은 35곳 중 7곳으로 20%에 그쳤다. 진료과가 10개도 안 되는 의료원도 있었다. 자기공명영상(MRI) 등 첨단장비를 갖춘들 정작 이를 운용할 의사가 없는 의료원도 상당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방의료원 관계자는 "영상의학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 어렵게 은퇴한 60대 의사를 영입했다"면서도 "하지만 최근 장비에 대해선 잘 몰라 촬영 이후 판독은 외주업체에 맡긴다"고 토로했다.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장인 조승연 원장은 "지방의료원이 제 역할을 하려면 대도시는 아무리 적어도 500병상 이상, 중소도시는 300병상 이상은 있어야 감염병 대응 등 국가 의료 정책을 이끌 역량이 생긴다"며 "복지부가 (독자적으로) 개선할 수 없고, 대통령실이나 국무총리실 산하에 '공공의료특별위원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국가 차원의 공공의료 회복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 싣는 순서
<의사 캐슬 '3058'_시한부 한국 의료> ①'슬의생 99즈'는 없다 ②투석 환자는 고향에 못 사나요 ③의사 빈자리 채우는 PA 유령 ④정원이냐 수가냐, 누구 말이 맞나 ⑤벼랑 끝 한국 의료 되살리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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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