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독일 간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상대국 외교관에 대한 무더기 추방 조치를 주고받는가 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대응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 독일 정치권에 개입하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만 해도 우호적 관계였던 두 나라가 이제는 ‘극한 갈등’ 국면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22일(현지시간) 자국 주재 독일 외교관에 대한 ‘맞추방’ 조치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외무부는 이날 성명에서 "독일 당국이 또다시 러시아 외교관을 대거 추방하기로 결정했다"며 "양국 관계 전체를 도전적으로 파괴하려는 독일의 오만한 시도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어 "독일의 적대적 행위에 대한 대응으로 러시아는 독일 외교관을 추방하기로 했다"며 "러시아에 주재하는 독일 외교공관의 직원 수도 대폭 제한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정확한 추방 규모나 이유는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 외무부는 지난 5일 독일 정부가 주독일 러시아 대사관에 추방 방침을 통보했다는 사실만 밝혔다. 독일 일간 빌트는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약 90명의 모스크바 주재 독일 외교관 중 3분의 1인 34명이 추방 대상이 됐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4월에도 독일은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을 이유로 러시아 외교관 40명을 추방했고, 러시아 역시 동일 규모의 보복 조치에 나선 바 있다.
사실 두 나라는 1년여 전만 해도 긴밀한 경제적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독일은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의 최대 수입국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이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14개월째에 접어들면서, 이전 주요 교역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계속 악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더해 러시아의 ‘독일 정치권 개편 공작’을 보여 주는 문건도 공개돼 파장이 일고 있다. ‘반(反)우크라이나 여론 조성’을 위해 독일의 급진좌파 정당 ‘좌파당’ 일부 세력과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합쳐 새로운 정치연합을 꾸리도록 러시아가 유도했다는 내용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유럽의 한 정보기관이 입수한 러시아 내부 문건을 확인했다며 21일 이같이 보도했다.
WP에 따르면, 지난해 7~9월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들 문건의 내용은 꽤 구체적이다. 작년 7월 13일 회의를 주재한 세르게이 키리옌코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은 “유럽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줄이려면 독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해 9월 9일 문건에선 “자라 바겐크네히트 의원 등 좌파당 일부 세력과 AfD를 연대시키자”는 방안도 제시됐다.
실제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도 있다. WP는 “문건 작성 시점에 바겐크네히트 의원의 측근과 AfD 일부 구성원이 러시아 당국자들과 접촉한 사실은 확인됐다”고 전했다. 비슷한 시기에 AfD에서 바겐크네히트 의원 지지 목소리도 동시다발적으로 나왔다.
물론 사실로 단정하는 건 이르다. AfD는 답변을 거부했고, 바겐크네히트 의원도 WP에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라며 AfD와의 협력 가능성을 일축했다. 러시아 크렘린궁도 “100% 가짜”라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러시아와 독일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터라, 이번에 제기된 의혹이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