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노년 생활

입력
2023.04.22 05:00
[한창수의 마음 읽기]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병원을 오래 다니신 어르신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지금 이렇게 아픈 몸은 언제 낫느냐는 질문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이 분들의 ‘낫는다’는 기준은 몸 아프지 않고 약도 먹지 않으면서 예전처럼 활동하는 것이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에 쌩쌩하던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의사에게 묻거나 병 탓, 세월 탓, 자식 탓을 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병원비 쓰고, 자식들 힘들게 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집안에서 역할도 줄면서 돌아보는 이도 적어져 쓸쓸하고 외로워진다. 몸이 덜 바빠지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자주 생각하는가 보다.

가끔 만나는 스님과 신부님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보다 이런 어른들을 더 많이 만나는데, 종종 “그냥 사는 거지. 교만하게 인생 의미를 찾는다”라며 일갈한다고 한다.

지금 어른들은 부모가 쉰 넘어 환갑 전후 돌아가시는 걸 많이 보셨으니 스스로 여든 넘어 산다는 것을 예상하거나 마음 준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평균 83.5년(남 80.5세, 여 86.5세)이니 말이다.

노년에는 상실하는 것들이 많다. 건강, 수입, 역할, 그리고 인간관계가 대표적이다. 그저 편안하게 나이 듦을 인정하고 돌봄과 사회적 지지를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지만, 도움을 거절하고 이런 신세가 된 자신을 한탄하며 주변을 원망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신경성 신체 증상과 울분에 빠져 약을 먹는 신세를 한탄한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왜 사는 건지’를 알고 태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고 젊고 기운 좋을 때는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던 분들의 모습이다.

철학자 세네카는 노화를 겪는다고 우리 마음까지 쇠락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노년에 이르러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이 고맙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적 위치와 역할은 줄어들지만, 삶의 부담도 감소하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몇 달 전 영화 ‘인생을 아름다워’를 관람했다. 정신 없이 살던 중년의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이 첫사랑을 찾아 전국을 여행하고, 지인들을 불러 삶을 마무리하는 파티를 연다는 슬프지만 즐거운 추억 영화였다.

눈물이 났지만, 속으로는 ‘사람들 모두 말은 하지 않지만 각자의 아픔이 있을 것이다. 다들 정해진 순서 따라 갈 것인데 왜 내가 먼저 가는 것을 기려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갈 날은 모르는 게 사람인지라 영원히 살 것처럼 돈에 굶주리고 권력을 탐하며, 가족과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평균 83년 근처를 산다고 하니까, 나도 그 즈음까지 살 것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굳이 미리 “죽고 싶다”고 푸념하지 말고, 대충 그 나이 근처를 종점 삼아 적절한 시점부터는 감속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다.

마음의 속도를 줄이면서 욕심도 줄여 나가는 것이다. 물론, 그 시점이란 건 상황이나 건강, 경제력에 따라 다를 터이다. 혹시 그러다 더 살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좀 더 남들과 이 사회에 도움되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

클리닉에서 만난 어른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자동차도 세월이 흐르면 정비를 잘 해도 새 차가 되지 않는 것처럼 속도를 좀 줄이고 정비소에 들리는 걸 편하게 생각하시라”고. 어르신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이다.


권대익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