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남부 알메리아부터 무르시아에 이르는 땅에 거대한 비닐하우스 채소 재배단지가 있다. 그곳에 가본 적은 없지만, 우주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인공 구조물로 알려졌을 만큼 압도적 크기를 자랑한다고 한다. 사계절 따스하고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이곳에서는 한겨울에도 따로 난방장치를 가동할 필요가 없다. 축복받은 기후 덕에 쇠 프레임 위에 홑겹 비닐을 씌워 대충 비바람을 막아 주기만 하면 사시사철 토마토며 오이, 상추 같은 과채류가 쑥쑥 자란다. 게다가 지중해를 넘어온 값싼 아프리카 노동력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덕에 한겨울에도 안정적인 생산량을 유지하며 유럽 곳곳에 과채류를 수출해 왔다. 특히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열매채소 토마토는 이곳 농부들의 삶을 튼실하게 떠받쳐 주는 효자 상품이다.
지난겨울, 이곳에 기상이변이 생겼다. 늦가을부터 된서리가 내리더니 때때로 돌풍과 폭설이 몰아치고 전례 없는 한파까지 찾아온 것이다. 겨울 추위에 대비한 난방장치를 갖추지 못했으니 농작물이 냉해를 입은 건 당연하다. 지역 경제를 책임져 오던 겨울 토마토 생산량은 급감했고 산지 가격도 서너 배 풀쩍 뛰었다.
말 그대로 된서리를 맞은 곳은 스페인 남부였건만, 정작 이곳의 기상이변으로 인해 뉴스 토픽을 만들어낸 나라는 영국이었다. 지난 2월 21일 영국 최대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와 아스다가 '고객 한 사람당 토마토와 오이, 고추 구매를 3개로 제한'한다는, 우리로서는 다소 생뚱맞은 발표를 했다. 텅 빈 토마토 판매대가 화면에 비치고, 이제 우리는 피자와 스파게티도 못 먹게 된 거냐며 불뚝 성을 내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함께 전해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곡물류에 비해 과채류 자급도가 매우 낮은 영국은 특히 겨울 토마토의 약 95%를 스페인 남부에서 들여왔다. 그런데 산지 수확량이 급감한 데다 유가 상승으로 운송비마저 치솟자 바다 건너 영국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린 탓이 크다.
브렉시트의 영향으로 식량 공급망이 부실해졌다는 분석까지 곁들인 뉴스를 들으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만일 우리에게 유사한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 2021년 기준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40%를 간신히 턱걸이했다. 곡물류 자급률은 특히 낮아서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식량 안보가 벼랑 끝에 놓였지만, 그 어떤 위정자도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주말 농부 5년째에 접어든 나는 이제 그 까닭을 안다. 돈 때문이다. "워매! 평님이 너는 잘 풀린 셈이여. 농부로 주저앉었으믄 일당 5만 원도 못 받겄다야." 핸드폰 메시지 알람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심지어 오줌 마려운 것까지 참아가며 열심히 미나리 다듬는 나를 보고는, 일손 도와주러 온 89세 할머니가 툭 던진 말이 핵심을 찌른다. 매출 대비 내 인건비를 가늠해 보니 대략 3만 원 언저리다. 이런 현실에서 고향 떠나 먼 길을 가 버린 사람에게, 혹은 뜻있는 젊은이들에게 어찌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게는 다른 셈법도 있다. 벼, 감자, 콩, 오이, 토마토, 들깨, 딸기… 이 땅의 수확물로 한 달쯤 견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몇 명까지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아버지는 150명 내외라고 명쾌하게 답하셨다. 우하하하! 세로토닌이 샘물처럼 분출하고, 녹슬었던 행복회로가 다시 힘차게 펌프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