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방대 의대 차석 졸업자 윤지원(가명)씨는 전문의 따기를 포기했다. 전공의(레지던트) 수련을 하지 않고 일반의(GP)로 남은 윤씨는 미용의원 월급의사로 필러나 보톡스 시술을 한다.
의대 시절 성적도 좋고 연구 활동에도 두각을 나타내 교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유망주였다. 그래서 윤씨의 '전문의 포기 선언'은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고 한다. 의대학장과 병원장까지 나서 "너같은 친구가 병원에 남아야 한다"며 만류할 정도로.
하지만 전문의를 포기하고 수 년이 지난 지금. 윤씨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미용 일이 적성에 맞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도 좋아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대학병원에 돌아가 전공의 과정을 다시 밟을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의 미용 의원을 개원하는 것이다.
당신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①하나는 돈 많이 벌면서 내 시간도 챙길 수 있는 '워라밸 직업'. ②다른 하나는 잘 시간도 없이 바쁘고 몸은 고된데 수입은 되레 적은 직업이다. 단 이 직업에는 존경과 보람이 뒤따른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고를 것인데, 젊은 의사들은 자신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필수과보다 돈은 많이 벌면서도 업무강도는 낮은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재영'(정형외과·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으로 가는 것은 이들에겐 어쩌면 '합리적 선택'이다.
"그래도 의사가 기본적인 사명감은 가져야 하는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의대에서 '사명감'이란 단어는 희미해진 지 오래다. 일반의 자격으로 서울에 미용 의원을 개원한 박태훈(30·가명) 원장은 "의대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 가는 곳이지, 사람 살리겠다고 가는 학생이 얼마나 있겠냐"고 말했다. 서울 소재 의대 본과 4학년 김은주(28·가명)씨는 "동기들과 돈 얘기를 제일 많이 한다"며 "다들 (대학)병원에 남기 보단, 전문의 따서 개원할 생각뿐"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시작이 이렇다보니 졸업 후 전공을 선택할 때도 그 기준은 '사명감'보단 '기대 소득'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보람이 있는 과보다는 나중에 개원해서 돈 되는 과로 의대생들이 몰리고, 그게 바로 피안성을 비롯한 선호과다. 돈 되는 과의 핵심은 비급여 진료(환자가 비용 전액 부담)다. 정부가 수가를 정한 보험 진료와 달리 비급여 항목은 의사의 자율성이 인정된다. 피부과의 미용 시술이나 안과의 라식·라섹 수술, 미용성형 수술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런데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라고 불리는 필수과는 말 그대로 국민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의료를 담당하고 있어 진료 항목 상당수가 건강보험 체계 안에 들어간다. 즉 개원을 해도 건보가 정한 수가만 받을 수 있어 상대적으로 돈을 못 번다는 소리다. 대표적으로 소아과 개원의는 2010년(1억2,994만 원) 연봉보다 2020년(1억875만 원) 수입이 오히려 더 낮아졌다.
외과계열은 전공 특성상 개원이 어려운 과도 많다. 예를 들어 심장과 폐 등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들을 다루는 흉부외과는 막상 종합병원 밖을 나가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의원급에서 가슴을 여는 수술(개흉술)을 할 방도가 없기 때문. 결국 하지정맥류(표재정맥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꼬인 상태) 치료 정도의 특기를 살릴 수밖에 없는데, 그 수요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머리를 여는 수술을 하는 신경외과 뇌 파트 전문의도 의원급에선 자기 술기를 쓸 수가 없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인력실태조사(2020년)에 따르면, 외과는 53.4%가 전공과 무관한 진료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고, 흉부외과(82%)는 더 심했다. 피안성 등 선호과 전문의들이 개원할 때 본인 전공을 살린 경우가 90% 넘는 것과 상반된다.
근무시간도 '비(非) 바이탈과'가 압도적으로 짧다. 한국일보가 대한전공의협의회 협조로 개설한 바이탈과 전공의·전문의 익명채팅방에서 만난 한 전공의는 산부인과 수련을 그만두고 '워라밸과'로 꼽히는 진단검사의학과로 옮겼다. 그는 "(산부인과에선) 전공의 80시간 법이 있었음에도 주 100시간 가까이 일했다"며 "공식적으로 오전 7시 출근이었지만, 실질적으론 5시에 출근해도 빠듯했다"고 말했다.
바이탈과에서 피할 수 없는 '극한의 노동시간'을 생각하면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가도 고개를 젓게 된다. 인턴 수료 이후 현재는 서울 지역 한 종합병원의 '정재영' 중 한 곳에서 수련 중인 전공의 임서형(30·가명)씨는 "인턴 돌면서 본 외과 전공의 쌤들이 너무 멋있었지만, '바이탈뽕'(중환자를 살릴 때 느끼는 보람이 마약 같다는 의미로 쓰이는 은어)에 취했다간 인생 망하는 길이겠다 싶어 마음을 접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오죽하면 인턴 동기들끼리 '외과 지원하면 정신 차리게 서로 뺨 때려주자'는 말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경제적 보상만 확실하다면 수련 과정의 고난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반례도 있다. 전공의 때 힘들어도 전문의 취득 후 고연봉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게 바로 정형외과다. 한 전공의는 익명채팅방에서 "정형외과를 오스(Orthopedic Surgery)라 부르는데, '오스 5억'(정형외과 연봉 5억)이라는 말까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외과 3년차 전공의도 "오스(OS)는 불패"라 소개하며 "수련강도가 세지만 나가면 페이가 보장되니 (정형외과에) 못 가서 안달"이라고 말했다.
분위기가 이러니 전문과목 수련 자체를 안 하고 바로 개원하거나, 바이탈과 수련을 하다가도 중도포기하는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턴만 마치고 미용의원에서 일하는 윤지원씨는 "예전엔 중도 포기하면 하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아니다"며 "소아과 같은 경우는 전문의를 따도 전망이 어두우니 중간에 나오면 주변에서도 다들 잘 그만뒀다고 한다"고 말했다. 같은 선택을 한 박태훈 원장도 "생명을 살리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막상 직접 그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극심한 노동 강도 문제도 있고, 또 기존에 정해진 수련 시간과 과정을 꼭 따라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윤씨와 같은 미용의원에서 일하는 일반의 1명도 소아과 전공의 수련을 그만두고 미용의 길로 넘어왔다고 한다.
실제로 전문의 자격시험 응시인원은 매년 꾸준히 하락 중이다. 10년 전인 2014년만 해도 연간 3,558명이 전문의 시험을 쳤지만, 올해 초엔 2,861명만이 응시했다. 감소한 700명 중 상당수는 피부·미용, 통증 등 개원가로 빠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전문의를 딴 뒤에도 전문의 간판을 포기하고 일반의 자격으로 미용 분야에서 일하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 서울의 한 재활의학과 전문의는 흉부외과 전문의인 자기 선배 사례를 조심스럽게 소개했다. 그 선배는 의료소송으로 환자와 갈등을 겪고 난 뒤 본업을 포기하고 모발이식 분야로 넘어갔다고 한다.
미용 시장에 뛰어든 일반의가 늘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는 자료도 있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일반의가 개원한 의원은 전국에서 18.58% 증가했지만, 미용 의원이 집중된 강남구(106%)와 서초구(104%)에선 일반의 개원이 2배 이상 늘어났다.
미용 시장은 이미 레드오션이지만, 이 점이 오히려 수련 포기를 더 부추긴다는 분석도 있다. 서울에서 개원한 피부과 전문의 정우림(36·가명)씨는 "어느 전공을 하든 결국 다 미용으로 가는 세상이고, 시장은 포화상태기 때문에 전문의 안 따고 오는 게 차라리 합리적"이라며 "수련하는 사이 시장 경쟁자는 더 늘어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동훈(39) 중앙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필수과에 지원하지 않고, 수련 자체도 하지 않는 건 의대생들 입장에선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이들을 비난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의료 현장을 떠나 사기업에 다니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이준영(38·가명)씨도 "보람은 순간이지만 (통장)잔고는 현실"이라며 젊은 의사들의 선택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젊은 의사들의 선택을 '합리적'이라고만 치부하면서, 필수과 진료에 생긴 거대한 구멍을 방치만 해 둘 수 있을까? 이 현상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와 비슷하다. 의사 개개인은 모두 합리적 선택을 하겠지만, 그 선택의 총합인 의료시스템 전체는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절약은 개개인에게는 미덕이지만 국민경제 전체적으로는 수요 저하(불황의 원인)로 이어진다는 '절약의 역설'과도 유사하다.
절약의 역설이 불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해 수요를 창출해야 하듯, 결국 의대 선호과·기피과 문제에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방재승(53)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앞으로 10년 내에 의료시스템을 개선시키지 않으면 피해가 당장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당장 내 자식이 살아갈 세상만 해도 '뇌출혈 생기면 누구에게 진료받아야 하나'하는 시대가 될 것 같다"고 우려했다.
'그 많던 의사는 다 어디로 갔나' 인터랙티브 보기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42817583729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