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와 TSMC 등 국제 반도체 업체들이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해 제정한 반도체과학법(CHIPS Act)을 근거로 반도체 기업들에 지원하기로 한 보조금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미 정부가 내건 까다로운 조건이 불만스럽지만 일단 신청서를 내고 대신 세부 조건에 대해선 추가 협상을 통해 풀어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20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추진 중인 메모리 반도체 첨단 패키징(후공정) 제조시설 설립의 세부 사항이 결정되는 대로 보조금을 신청할 방침이다. 회사 관계자는 "투자 관련 부지 선정 등 적극적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며 "절차가 완료되는 대로 신청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미국에 대대적 투자를 예고하고 있는 대만의 TSMC 역시 보조금 신청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19일(현지시간) TSMC가 최대 150억 달러(약 20조 원)에 이르는 보조금 신청을 고려 중이라고 전했다. 이 회사는 이날 열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신청 절차가 진행 중이기에 구체적 사항을 밝힐 수 없다"며 "회사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택할 것"이라고 밝혔다.
14일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지원법상 보조금 지급 신청을 앞두고 기업들의 신청 의향서(Statement of Interest)를 받고 있다면서 "200개 이상의 기업이 의향을 보였다"고 알렸다. 다만 어떤 기업이 의향서를 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는 "의향서는 관심 있다 정도"라며 "미국으로서도 지원금을 주려면 내부 승인 절차가 필요하며 기업의 요구 조건을 탐색하는 차원"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 안팎에서는 "보조금 신청 요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불만이 여전하다. 이들은 ①초과이익 공유 제도와 ②영업상 기밀에 해당하는 세부 회계 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에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서는 ③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증설할 수 없게 만든 '가드레일' 조항이 여전히 부담이다. 미국 내에서도 보조금 지원 요건으로 설정된 ④환경 보호, 보육시설 등 노동력에 대한 필수 투자 요구가 너무 깐깐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미 정부도 이를 의식한 듯 해명에 열심이다. 상무부 반도체법 프로그램 사무국은 홈페이지의 '자주 하는 질문(FAQ)' 코너를 통해 초과이익 공유가 "이익이 전망치를 크게 넘는 경우에만 발동하기 때문에 대부분 사업에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보조금 신청 기업이 기밀 자료를 기입해야 한다는 우려를 두고 "정보 자유법에 의한 공개 면제 대상으로 나와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법이 자국 우선주의로 해석되는 것도 경계했다. 사무국 마이크 슈미트 국장은 13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팟캐스트 '오드로츠'에 출연해 "우리는 자급자족하는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게 아니라 파트너 및 동맹국과 협력해 국제 공급망을 더 탄력적으로 만들려고 한다"며 "한국·일본·대만·유럽과 적극적으로 대화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는 이를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는 입장이다. 미 상무부가 지난해 10월 중국을 대상으로 설정한 반도체 제조장비 수출 규제와 더불어 이번 반도체법 역시 지정학적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앞서 CNBC에 출연한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지원금은 미국 내에서 쓰여야 한다"며 "우리 돈을 가져가면 첨단 반도체 생산을 위한 확장을 중국에서 실행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