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에 사는 정모(43)씨는 어린이집 유아반에 다니던 네 살 둘째 아이를 올해부터 유치원에 보냈다. 금리 인상으로 아파트 대출 이자 압박이 커진 탓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여보려 선택했던 어린이집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양 기관의 격차를 눈으로 본 이상 계속 어린이집에 보낼 순 없었다고 했다. 정씨는 "어린이집은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개점휴업 상태로 아이들을 방치한 반면, 유치원은 뭐라도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더라"며 "아이가 심심해서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는 걸 본 부모라면 유치원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인구 감소에 원아 이탈마저 늘어나면서 동네 어린이집 2곳이 최근 문을 닫았다고 했다.
#경기 수원시 광교신도시에 사는 원모(40)씨는 올해 만 3세가 된 아이를 유아 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에 보냈다. 아이에게 영어 조기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집 근처 유치원은 국공립, 사립 가릴 것 없이 한참 후순위 대기 번호를 받았다. 원래 다니던 가정어린이집은 0~2세만 다닐 수 있다. 좁은 공간에 아이와 교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정어린이집의 열악한 환경을 지켜본 입장에서 어린이집 유아반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돌봄 공백을 우려한 원씨는 "울며겨자먹기로 영어유치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한 달에 200만 원 정도 부담이 늘어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맬 작정"이라고 말했다.
만 3세. 한국의 유아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갈림길에 선 나이이자, 국가 교육시스템 속에서 처음으로 '교육 격차'가 발생하는 시점이다. 1920년대 저소득층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로 생긴 탁아소에 뿌리를 둔 어린이집과, 1890년대 후반 대한제국 시절 일본인 유아교육을 시작으로 설립된 유치원의 태생적 간극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존재한다. '만 3세의 선택'은 곧 돌이킬 수 없는 학력 차이의 씨앗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어린이집은 '보육', 유치원은 '교육'에 집중한다. 부모들은 아이 양육을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 경제적 부담, 접근성, 시설과 프로그램 등을 고려해 보낼 곳을 선택한다.
그런데 절반 이상의 학부모는 아이가 만 3세가 되면 어린이집을 떠나 유치원으로 옮기는 선택을 한다. 지난해 3~5세 중 유치원에 다니는 인원은 55만2,812명(55.7%)으로 어린이집 이용 인원 43만9,070명보다 11만3,742명 더 많았다.
부모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이유는 추가 부담 없이 연중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하루 12시간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연장도 가능하다. 살림이 빠듯하고 일이 바쁜 맞벌이 부부에겐 최선의 선택이다. 보육교사들은 아동복지학과 계열 출신이 많아 돌봄에 강점이 있다.
유치원은 '교육의 질'에 방점이 찍혀 있다. 유아교육과 출신 교사들이 포진해 있고, 교육 프로그램도 더 알차다. 이를테면 영어 원어민 수업을 어린이집은 주 1회, 유치원은 주 3회 운영하는 식이다. 다만 돌봄에는 취약하다. 정규 교육과정이 끝나는 오후 1, 2시부터 방과후 과정을 들으려면 학부모가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방학 때 돌봄 공백에 대비한 '플랜B'를 짜두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두 기관의 비용 격차는 꽤 크다. 정부가 3~5세 아동에게 지원하는 누리과정(유치원·어린이집) 지원금(월 28만 원) 외에 사립유치원의 경우 학부모가 매달 부담하는 교육비는 서울이 27만3,000원, 전국 평균 16만8,000원 수준(2022년 기준)이다. 어린이집의 경우 입학금과 특별활동비를 포함해 월 5만6,000원(2021년 기준)을 추가 부담한다. 유치원이 어린이집보다 3~5배 비싸다.
결국 유치원은 어린이집보다 돈을 더 받고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는 셈인데, 이는 3~5세의 평등한 교육을 위해 도입된 '누리과정'과 무상교육을 명시한 유아교육법, 영유아보육법이 현실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2015년 통계를 보면 가구소득이 월 600만~699만 원인 가정의 유치원 이용률(37.7%)은 월 149만 원 이하 가정(18.7%)의 두 배에 달한다.
경기 성남시 판교에 사는 이모(40)씨는 "수영장까지 갖춘 유치원도 있을 정도니 어린이집이 고급 사립유치원 시설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며 "체험활동, 국어·영어, 발레·바이올린 등 예체능 수업 등에서 두 기관의 격차는 해소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크다"고 말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지향점이 달라 아이들은 혼란을 겪기도 한다. 대전에 사는 장모(41)씨는 "아이가 유치원에 간 첫날 다른 아이를 때려 벽을 보고 서 있는 벌을 받았다"며 "유치원 교사가 '학교폭력' 운운하는 걸 듣고, 세 살짜리 아이를 대하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태도가 너무 급변해 당황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아이는 불과 몇 개월 더 자랐을 뿐인데, 유치원은 마치 아이에게 돌봄이 필요 없는 듯 대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경기 용인시에 사는 이모(40)씨는 2년 전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다가 다시 어린이집으로 옮긴 케이스다. 이씨는 "아이가 언젠가부터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는데, 알고 보니 유치원에서 오줌을 싼 뒤 친구들이 놀렸고 선생님도 이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라며 "결국 다시 어린이집으로 옮겼는데, 다소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에게 맞춤 보육을 해준 어린이집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도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문모(37)씨 역시 "나도 어릴 때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넘어가면서 트라우마를 겪었다"며 "보육과 교육이 구분되는 게 아니라 적절히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 유아교육 체계의 문제점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①어린이집, 국공립유치원, 사립유치원, 유아 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 간에 교육 격차가 존재하며, 부모의 경제력이 기관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 ②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전환될 때 보육 기능이 지나치게 축소된다 ③지역에 따라 유아교육의 수요와 공급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울에 사는 오은선(36)씨는 "신도시는 대부분 과밀학급이라 보낼 곳이 마땅치 않은데, 남양주 등에는 유치원이 많지 않아 차로 20분 거리의 유치원 원장이 직접 아이들을 데리러 온다"며 "지역마다 양상은 다르지만, 불안정한 유아교육 여건 때문에 육아휴직 후 복직을 포기하고 가정보육을 선택한 친구들도 꽤 많다"고 전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 30년간 해결하지 못한 유보(유아교육+보육)통합을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정부는 2024년까지 학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해 유아교육비 지원을 확대하고, 2025년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하나로 합친 '질 높은 새로운 통합기관'을 만들 계획이다. 4년제 대학 졸업자가 각각 40.5%(유치원 교사), 27.7%(어린이집 교사)인 교사 양성체계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6년부터 시스템을 개편한다. 돌봄·신체활동·교육활동 등 각 기관이 정한 중점 분야에 따라 시설 기준도 새로 마련한다.
지역별 수요 격차에 대응하기 위해 교육부·교육청, 보건복지부, 지방자치단체로 흩어져 있는 관리 체계를 교육부·교육청 중심으로 통합한다. 현재 별도로 수립되는 '유아배치계획'과 '어린이집수급계획'도 '영유아배치계획'으로 일원화한다.
한국일보가 학계·시민단체 전문가 자문단 13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해 교육개혁 과제들에 대한 SWOT(기대효과·부작용·환경적 기회요인·난관) 분석을 진행한 결과 전문가들은 정부가 강한 의지를 보이며 교육부 중심으로 유보통합 계획을 수립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추가 재원 마련 방안이 불확실하다는 점은 한목소리로 우려했다.
상향 평준화 통합, 실질적 무상교육, 교사 처우 개선 등을 이루려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정부는 유보통합 추진 과정에서 최대 2조6,000억 원가량의 추가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을 시도교육청의 초중등 교육예산인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서 충당할 예정이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추가 재원으로 쓰일 경우 초중등교육이 부실화할 우려가 있다"며 "누리과정 도입 때 지방 교육청의 재정 고갈 문제가 불거졌던 오류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수는 "오히려 유치원 투자가 위축돼 하향 평준화의 우를 범할 수 있다"며 "교육교부금 외에 정부가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미비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가장 큰 걸림돌로는 오랫동안 별도로 적용돼 온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원의 자격·처우, 시설 기준을 통합하기 어렵다는 점이 꼽혔다. 유보통합 과제에 응답한 자문단 12명 모두 이 문제를 지적했다. 이는 지난 30년간 유보통합 실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보통합 추진 발표 이후 유치원 교원단체를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거세다.
교육부 관계자는 "현재 유보통합추진단·추진위원회는 의견 수렴을 통해 쟁점별 세부 통합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며 "관리체계 일원화 방안의 진전된 내용은 6월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0~2세 때 어린이집에 다니다 3세부터 유치원으로 옮기면서 겪는 아이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유보통합이 교육 못지않게 정서적 돌봄도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민세진 동국대 교수는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이를 개선하려면 한 건물 내에서 0~5세까지 쭉 지낼 수 있어야 하므로, 시설이 좋은 국공립 어린이집과 사립유치원을 통합기관으로 전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반상진 전북대 교수는 "학부모의 왜곡된 교육관이 통제되지 않으면 유치원은 물론 어린이집마저 돌봄의 공간이 아닌 학습의 공간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교육개혁 자문단(가나다 순)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장, 김민희 대구대 교수, 김병주 영남대 교수, 민세진 동국대 교수,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반상진 전북대 교수,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 송기창 숙명여대 교수, 이범 교육평론가, 임희성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 정제영 이화여대 교수, 조상식 동국대 교수
※글 싣는 순서
①공정한 출발선은 가능한가
②잠자는 교실 깨우려면 필요한 것들
③위기의 대학, 재도약의 필수조건
④실효성 있는 인재 양성 정책의 실마리
⑤교육계 뒤흔들 남은 쟁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