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버가 시험주행을 마친 차량을 피트(pit)에 멈춰 세우자 엔지니어는 가장 먼저 타이어부터 살폈다. 공기압 등 타이어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손을 타이어 근처로 가져가 보니 뜨끈한 열기가 여전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모은 정보가 대회에서도 타이어의 컨디션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금호타이어가 운영하는 엑스타레이싱 관계자는 "레이싱 대회는 타이어 기술 경쟁의 무대"라고 귀띔했다.
국내 최상위 레이스 CJ대한통운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슈퍼 6000 클래스'가 막을 올리면서, 국내 타이어 업체들의 서킷 위 기술 경쟁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22일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문을 연 올해 대회에는 8개 팀에 나뉘어 속한 18명의 드라이버가 두 개 회사(금호·넥센)의 타이어를 장착하고 출전했다.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와 전남 영암군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 강원 인제군 스피디움에서 펼쳐지는 2023 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은 11월 5일 최종전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레이싱용 타이어는 일반 차량용과 완전히 다르다. 특히 마른 노면용 타이어에는 무늬가 아예 없다. CJ로지스틱스 레이싱 소속 드라이버 박준서(22)는 "최대 시속이 260km를 넘나드는 레이싱 특성상 최대한 많은 면적이 바닥에 닿아야 중력을 받아줄 수 있다"며 레이싱용 타이어의 특징을 알려줬다. 실제 드라이버와 레이싱 차량에 탑승해보니 시속 240km의 질주에도 타이어와 노면이 '착' 달라붙는 느낌이 전해졌다. 한 관계자는 "레이싱 도중 타이어가 터지면 그 대회는 끝이라고 보면 된다"고 할 정도로 타이어는 차량의 퍼포먼스를 완성하는 핵심 요소로 꼽힌다.
슈퍼레이스 같은 레이싱 대회는 타이어 회사로서는 여러 제품을 테스트하면서 기술력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최적의 무대다. 서킷 컨디션과 기온, 습도 등 다양한 변수에 적응해야 하고 다양한 컴파운드(고무 등을 배합하여 만든 재료)를 체크할 수 있다. 박효섭 넥센 볼가스 모터스포츠 감독은 "타이어가 그날의 서킷 컨디션과 찰떡궁합일 때는 철길 노선을 따라 고속철도가 마음 놓고 속도를 내는 느낌에 비유될 정도"라면서 "반대로 타이어 퍼포먼스가 떨어지면 차량의 성능도 덩달아 떨어지고 드라이버도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한다"고 했다.
올해 서킷 위 '타이어 전쟁'의 최대 변수는 국내 레이싱 타이어 1인자로 여겨졌던 한국타이어의 불참이다. 지난달 12일 발생한 대전공장 화재 탓이다. 공교롭게 레이싱용 타이어가 제작·보관되는 2공장에서 불이 나면서 시즌 시작 전부터 레이싱계는 충격에 빠졌다. 일단 한국타이어가 운영하는 레이싱팀인 한국 아트라스BX 모터스포츠는 지난 시즌 종합우승을 하고도 이번 시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고, 지난해까지 한국타이어를 썼던 준피티드레이싱은 금호타이어를 달았다.
지난해 한국타이어를 장착했던 볼가스 모터스포츠는 대전공장 화재가 일어나기 전인 올해 초 타이어 공급업체를 넥센타이어로 바꾸면서 팀명도 '넥센 볼가스 모터스포츠'로 교체했다. 업계에선 "천운"이라고 할 정도다. 지난 시즌 우승팀 아트라스BX가 불참한 상황에서 지난해 준우승을 함께 일군 김재현과 정의철을 드라이버로 보유한 넥센 볼가스는 자타공인 이번 시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넥센은 볼가스를 비롯해, 서한GP, CJ로지스틱스, L&K모터스에 자사 타이어를 장착하는 대규모 투자를 했다. 박 감독은 "지난해 최종라운드에서 넥센타이어를 썼던 팀들의 퍼포먼스가 좋았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이번 시즌 팀 전체가 합심해 지난해 준우승의 아쉬움을 꼭 풀 것"이라고 했다.
개막 라운드에서는 금호타이어가 먼저 웃었다. 엑스타 레이싱팀의 이창욱, 이찬준이 각각 22일 열린 1라운드와 23일 열린 2라운드를 제패하면서다. 이창욱은 1라운드 결승서 넥센 볼가스의 김재현에 이어 두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뒤늦게 김재현의 '차량 추돌' 판정 결과가 나오면서 데뷔 첫 승을 기록했다. 2라운드 예선부터 1위를 차지한 이찬준은 결승에서도 단 한번도 추월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운영으로 완벽한 주행을 선보이며 ‘폴투윈(출발 그리드의 맨 앞자리에서 출발하여 우승)’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