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신상’ ‘파격 세일’ 대신 ‘입점 문의’ ‘임대 문의’ 안내문이, 들뜬 손님 대신 헐벗은 마네킹이 무리 지어 서 있다. 휑한 매장에는 진작에 장사를 접고 떠난 이들이 미처 치우지 못한 흔적과 아직 떠나지 못한 이들이 야금야금 쌓아 놓은 적재물이 따끈한 신상을 대신하고 있다. 지난 12일 동대문 의류 쇼핑몰 한 곳에서 확인한 공실만 600군데가 넘었다. 이날 촬영한 공실 사진을 모아 연결해 보니 왠지 스산하다 못해 암울한 느낌마저 든다.
이날 서울 중구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의 대형 의류 쇼핑몰 내부는 대낮인데도 어두운 곳이 많았다. 모두 휴업이나 단축 영업을 넘어 아예 방을 뺀 매장들이다. 이 쇼핑몰의 공실률은 90%에 달한다. 그러다 보니, 영업 중인 상인들도 적막한 분위기를 달래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수년째 작동을 멈춘 로비 중앙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오르니 손님은 기대하지도 않은 듯 곤히 잠든 상인의 머리가 매대 너머로 보였다.
이 쇼핑몰과 함께 한때 ‘패션 1번가’로 동대문을 상징하던 의류 집합상가 두 곳 역시 공실률이 각각 50%, 35%나 된다. 장·단기 휴업 중인 매장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세 곳 중 공실률이 가장 낮은 쇼핑몰의 경우에도 이날 직접 확인해 보니 층별 공실률은 최대 76%에 달했다. 그나마 가장 손님이 많은 1층조차 215개 매장 중 22개가 완전히 철수했다. 점점 느는 텅 빈 공간을 보고 고객들도 발길을 돌리는 악순환이 진행 중인 것이다.
업계에선 동대문 패션특구가 2006~2007년 전성기를 맞은 뒤 크게 두 차례의 악재로 인해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 첫 번째는 '사드(THAAD)' 배치 논란이다. 당시 국내 패션 업계가 브랜드 제품과 온라인 쇼핑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중국 수요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는데, 사드 논란으로 '한한령'이 내려지면서 1차 직격탄을 맞았다. 두 번째는 코로나19다. 한한령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의 기미가 보이나 싶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중국을 비롯한 외국인 수요가 전멸하며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됐다는 것이다.
원단부터 완성복까지 한 생태계에서 조달하는 동대문형 의류 산업이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시각도 있다. 관광특구 사무국 관계자는 “동대문의 강점은 좋은 옷을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현재는 인건비가 너무 올라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며, “2007년까지만 해도 동대문 시장 옷 중 95%는 국산 원단으로 짓고, 일부만 중국 원단으로 지었지만 현재는 비율이 반대다”라고 설명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쇠퇴한 시장을 과감히 떠나 다른 업종을 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동대문 의류 쇼핑몰처럼 점주들이 건물 지분을 나눠 갖는 집합상가가 전체 업종을 변경하는 것은 조합원마다 이해관계가 다른 지역 재건축조합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의류 산업이 활황이던 2000년대에 결정한 업종 규제에 아직까지 얽매여 있는 탓도 있다. 사무국 관계자는 “도매 시장은 그나마 아직까지 공실률이 15%대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나가는 업장이 많아진다”며 "동대문의 생존을 위해서는 업종 다양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