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회사 인텔과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이 12일(현지시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동맹을 맺었다. ARM이 설계한 모바일용 반도체를 인텔의 1.8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공정에서 생산한다는 게 양사 합의의 핵심이다. 파운드리 사업을 키우려는 인텔 입장에선 대형 고객 유치에 성공한 것인데, 시장 1위 TSMC와 2위 삼성전자를 겨냥한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텔 파운드리 부문은 이날 ARM과 함께 인텔의 1.8나노급 공정(18A)을 활용해 모바일 시스템온칩(SoC)을 개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SoC를 시작으로 자동차, 사물인터넷 등으로 협력 분야를 늘려간다는 계획이다.
영국에 본사를 둔 ARM은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일본 소프트뱅크의 자회사다. 반도체 설계 도면을 만드는 기업으로, 퀄컴이나 애플 같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이 ARM 설계도를 바탕으로 자체 칩을 만든다. 스마트폰의 두뇌 격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경우 90% 이상이 ARM이 제작한 설계도를 기반으로 할 만큼 특히 모바일 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업이다.
컴퓨터용 중앙처리장치(CPU) 제조업체로 잘 알려진 인텔은 2021년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했다. 2018년 파운드리 사업을 사실상 접었다가 팻 겔싱어 현 최고경영자(CEO) 체제로 들어와 재진출을 선언했다. 미국 오하이오, 애리조나주에 공장도 짓고 있다. 뒤늦게 질주를 시작한 만큼 아직 시장에서의 존재감은 미미한 편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와 삼성전자가 각각 58.5%, 15.8%였고, 인텔의 순위는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ARM이 인텔의 손을 잡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TSMC와 삼성전자엔 위협이 될 수 있다. ARM이 인텔의 기술력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인텔이 퀄컴이나 애플 같은 '큰손 고객'을 추가로 유치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관건은 1.8나노 공정의 양산 성공 여부다. 인텔은 삼성전자와 TSMC 사이 치열하게 벌어진 나노 기술 경쟁에서 탈락해 2020년 7나노 공정 포기를 선언하기도 했다. 3나노 등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2나노, 1.8나노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만큼, 실제 기술 달성 가능성을 놓고 의구심도 존재하는 상황이다. 다만 '최고의 반도체 회사'라는 명성을 오랫동안 유지해 온 저력의 인텔이 초미세 공정 양산에 성공하게 되면, 파운드리 수요를 상당 부분 가져갈 수 있어 삼성전자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