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먹는 돼지

입력
2023.04.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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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하면 생각나는 동물은 단연 다람쥐이다. 다람쥐 말고도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이 있는데, 바로 돼지이다. 몇 해 전부터 스페인 돼지 품종인 '이베리코'를 마트나 식당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이베리코는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생산된 돼지라는 뜻으로, 도토리를 먹고 자라 특유의 풍미가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돼지가 도토리를 먹는다니 쉽사리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은 '도토리'라는 말에는 이미 '돼지'의 의미가 숨어 있다.

15세기 문헌 '향약구급방'에는 도토리를 '저의율(猪矣栗)'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한자를 빌려 쓴 차자 표기이다. '저(猪)'는 돼지의 옛말인 '돝', '의(矣)'는 관형격조사, '율(栗)'은 '밤'으로, '도ᄐᆡ밤'으로 읽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즉, '돼지의 밤' 또는 '돼지가 먹는 밤'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두시언해'에는 '도톨밤'과 '도톨왐'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지금도 '도톨밤'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ᄐᆡ밤'이 '도톨밤'이 되었고, '도톨밤'의 '도톨'이 접사 '-이'와 만나 '도토리'가 되었다.

'돼지'의 뜻이 숨어 있는 또 다른 단어로는 '고슴도치'가 있다. '고슴도치'는 15세기 문헌에 '고솜돝'으로 나타난다. '고솜'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돝'은 돼지를 말한다. 이후 19세기에는 구개음화를 겪어 '고솜도치'로 나타나고, 지금의 '고슴도치'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고슴도치가 돼지를 닮은 것도 같다.

흔히 쓰는 말인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지 못한 뜻이 숨어 있다.

이윤미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