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위기서 겨우 회복된 토종벌...생태다양성 지킬 근본대책 마련해야

입력
2023.04.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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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낭충봉아부패병으로 토종벌 80% 폐사
개량종 개발로 멸종위기 고비 넘겼지만
밀원수 부족 등으로 갈 길 멀어

벌통을 덮은 천을 열어젖히자 '지글지글' 소리가 났다. 많은 벌이 한꺼번에 날갯짓을 해서 나는 소리다. 벌집에 꿀을 채우느라 바빴던 벌들은 낯선 사람의 시선을 느끼자 더욱 빠르게 날며 경계했다. 최근 꿀벌 집단폐사로 벌집이 텅 비고 썩은 냄새가 가득한 양봉농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지난달 23일 방문한 제주 서귀포시 감귤밭의 토종벌 복원소. 이곳을 운영하는 김대립(49)씨는 토종벌 멸종위기에 대응하고 종 복원에 기여하면서 2021년 농촌진흥청으로부터 최고농업기술명인으로 선정됐다.

최근 문제가 된 꿀벌의 집단 소멸은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수입된 서양벌(양봉)에게 나타난 현상이다. 하지만 약 10여 년 전인 2010년쯤 삼국시대 때부터 한반도에서 살아온 토종벌(한봉)이 먼저 멸종위기를 겪었다. 지금은 회복의 길을 걷고 있지만, 김씨를 비롯한 토종벌 농가들은 당시의 고생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토종벌을 멸종위기로 몰았던 것은 낭충봉아부패병이었다. 벌집 속에서 자라는 애벌레의 소화기관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폐사하는 질병이다. 이 병은 토종벌에게는 치명적이었지만 종이 다른 서양벌에게는 쉽게 퍼지지 않아 '토종벌 괴질'이라고도 불렸다. 피해가 전국으로 퍼진 뒤 2011년 한국토봉협회는 토종벌의 95%가 궤멸됐다고 밝혔었다.

정부도 같은 해 전체 토종벌의 76.7%인 약 63억4,000만 마리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했다. 이에 2010년 42만여 개에 달하던 전국 토종벌 벌통 수는 2016년 1만 개로 줄었다. 그나마 힘겨운 복원 작업을 통해 2020년 10만 개 수준으로 늘었다.

토종벌 멸종을 막기 위해 정부가 택한 건 개량종 개발이다. 2011년부터 이어진 종 복원사업에 1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2018년 농촌진흥청은 낭충봉아부패병에 강한 토종벌을 모아 육종한 개량종 '한라벌' 개발에 성공했다. 이 벌이 보급되면서 토종벌 농가는 한시름을 덜었다. 하지만 '한라벌이 진짜 토종벌이 맞냐'는 논란도 여전하다. 원조 토종벌은 이미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토종벌 폐사 당시에도 전문가들은 이상기상의 여파를 의심했다. 2010년은 봄이 유독 추웠다가 여름에는 집중호우가 내리는 등 기후가 급변했고, 이에 벌의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바이러스가 더 쉽게 퍼졌다는 것이다. 다만 토종벌의 폐사와 기후변화의 연관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농가들은 환경오염과 밀원수(꿀벌이 꿀과 꽃가루를 수집하는 나무) 부족이 토종벌의 생존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밀원수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아까시나무는 서양벌이 좋아하지만 토종벌은 선호하지 않아 먹이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남아 있는 토종벌 농가들은 아예 메밀·유채밭 등 밀원을 직접 조성해 벌을 키우고 있다.

김대립씨는 "양봉벌은 아까시 등 큰 꽃을 선호하는 반면 토종벌은 들깨 등 작은 꽃을 선호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생태다양성을 위해선 두 종류가 모두 필요하다"며 "토종벌 복원처럼 양봉벌 폐사를 극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수 있지만 보다 심각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근본 원인을 찾아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 신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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