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로 영양실조 걸린 꿀벌, 아열대 감염병이 덮쳤다

입력
2023.04.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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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방문한 경북 상주의 한 꿀벌 농장. 농장주인 신창윤 양봉관리사협회 회장을 따라 들어간 저온저장고엔 봉판이 가득 차 있었다. 봉판은 벌의 애벌레가 자라는 집이다. 신 회장은 "지금 같은 봄에는 이 저장고가 텅 비고 봉판은 벌통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며 답답해했다. 하지만 이곳을 비롯한 여러 양봉 농장에선 봄꽃이 한창인 3월에도 봉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그 안을 채울 벌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국양봉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양봉농가 1만2,795곳 중 82%인 1만546곳에서 월동하던 꿀벌들이 소멸하는 피해를 입었다. 전체 153만9,522개 벌통 중 약 57.1%인 87만9,722개가 피해를 입어 약 176억 마리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된다.

꿀벌들은 겨울철 벌통 내부에 뭉쳐 비축해둔 꿀을 섭취하며 추위를 버틴다. 이때 태어난 애벌레들이 봄에 벌이 되어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식물의 수분(꽃가루받이)을 돕는데, 다 사라진 것이다. 2021년 약 78억 마리가 소멸된 데 이어 지난해 피해 규모는 더 커졌다. 꿀벌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지는 벌집군집붕괴현상(CCD)이 우리나라에도 발생한 것이다.

가장 유력한 범인은 응애라는 진드기다. 응애는 벌통에 기생하며 애벌레의 체액을 빨아 먹고 병원성 바이러스를 옮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2월 최근의 월동봉군 피해를 "응애가 전국적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방제제에 내성이 생긴 응애가 퍼졌고, 방제 적기인 7월에 충분한 방제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봤다. 농가들이 7월에 꿀이나 로열젤리를 더 생산하기 위해 방제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응애 발생이 처음 보고된 건 1950년이다. 응애의 종류 중 하나인 바로아응애는 1968년부터 이미 곳곳에 만연했고, 최근 꿀벌에 피해를 입힌 가시응애 역시 1990년대 중반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꿀벌의 군집 붕괴는 불과 3년 전부터 난데없이 발생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20년 역대급 장마에 영양실조 걸린 꿀벌들

꿀벌들은 사실 오랜 배고픔에 시달렸다. 2020년 우리나라의 벌꿀 생산량은 4,643톤이었다. 1년 전인 2019년 생산량(6만5,952톤)의 7%에 불과했다. 2020년 역대 가장 긴 장마와 집중호우가 이어지면서 꿀벌들은 비행이 어려워 꿀을 모으지도, 먹지도 못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해 중부지방의 장마일은 54일, 제주는 49일로 관측 이래 최장이었다.

더욱이 그해 4월은 서울에 진눈깨비가 관측되는 등 유독 추웠다. 이에 국내 밀원수(꿀벌이 꿀과 꽃가루를 수집하는 나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아까시나무가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이때 기후를 분석한 기상청은 "2020년은 기후변화가 이상 기상으로 빈번히 나타난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준 해"라고 평했다. 그해 태풍 피해로 여러 나무가 타격을 입으면서 이듬해 역시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굶주린 꿀벌에게 주어진 건 양질의 음식이 아닌 패스트푸드였다. 꿀 생산량이 줄어든 농가에서는 이듬해부터 빠른 수확을 위해 벌이 저장한 꿀을 바로 채취했다. 반면 벌에게는 설탕물을 먹였다. 전남에서 30년 넘게 양봉을 해 온 김윤식(57·가명)씨는 이로 인해 꿀벌의 면역력 체계가 무너졌다고 한탄했다. 김씨는 "꿀벌의 면역력이 회복되려면 적어도 4~6월 3개월간은 벌통에서 꿀을 채취하지 않아야 한다"며 "하지만 이 경우 농가는 한 해 수입을 날리게 돼 보상이 없는 상황에서는 꿀을 포기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널뛰는 기후에 열대 해충 피해까지

영양실조에 걸린 벌들에게 돌아온 건 악순환이다. 약해진 애벌레들은 응애가 옮긴 바이러스에 더 취약해졌다. 살아남아 성충이 된 벌은 체중이 줄거나 수명이 단축됐다. 여왕벌 역시 허약해져 건강하지 못한 알을 낳았다.

겨울철 빈번해진 이상고온은 벌의 월동까지 방해하고 있다. 이승재 서울대 국가농림기상센터 연구개발부장은 2021년 가을부터 지난해 1, 2월까지 전남 영암 지역의 꿀벌 월동을 분석한 연구에서 "기상 변동성이 높아진 것이 집단 폐사에 기여했을 것"이라 분석했다. 2021년 10월 이상고온과 이상저온이 연이어 발생해 겨울벌이 자라는 데 차질이 있었고, 11, 12월엔 이상고온으로 겨울벌의 수명까지 단축됐다. 이어 지난해 1, 2월에도 이상고온이 이어지며 때이른 시기 꽃을 찾아 나선 벌이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로 꿀벌 전염병은 더욱 창궐 중이다. 정철의 안동대 식물의학과 교수의 2015년 연구에 따르면 지구온난화가 계속될 경우 응애 집단의 규모가 두 배 이상 늘어날 수 있다. 실제 아열대 지역에 살던 꿀벌 기생충들이 국내에 유입돼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정 교수는 "중국에서 유입된 가시응애는 원래 아열대 지방에서 서식하며 온난화에 적응된 해충인데, 최근 우리나라 겨울철 온도가 계속 높아지면서 피해가 커졌다"고 말했다. 2016년부터는 남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열대 해충 작은벌집딱정벌레 감염증이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유럽 미국은 꿀벌 생태통로 구축... 한국은?

정부는 대대적 응애 방제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기후변화와 병해충 발생의 인과관계도 연구할 계획이다. 다만 "이번 꿀벌 개체 감소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진단은 논란이 됐다. 양봉 사육밀도가 높아 이미 일본이나 미국보다 벌이 수십 배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농가에서는 농작물의 수분을 도울 벌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연 생태계 속 나무들의 성장도 가로막아 먹이사슬 전반에 영향을 미칠 거란 우려도 나온다.

우리보다 먼저 CCD를 겪은 유럽과 미국은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1월 '화분매개자 뉴딜(New Deal)'을 발표했다. 꿀벌 나비 등 화분매개생물의 감소세를 2030년까지 회복세로 돌려놓겠다는 계획이다. 핵심은 유럽 전역에 밀원수를 심어 꿀벌 생태 통로 '버즈 라인(Buzz Line)'을 만드는 것이다. 미국도 2015년 '꿀벌 등 꽃가루 매개자 보호를 위한 국가 전략'을 발표하고 서식지 확대를 통한 폐사 방지 정책을 추진 중이다.

정철의 교수는 "꿀벌이 행하는 생태계 서비스는 단지 농업에만 가는 게 아니라 전 국민의 삶에 이어지는 것"이라며 "꿀벌에게 해가 덜 가는 약재를 사용해 방제를 하되, 다양한 밀원 식물을 확대 배치해 벌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상주= 김현종 기자
상주= 안재용 PD
양진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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