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7년 직선제 개헌을 막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낸 사실이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경찰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명동성당 집회를 ‘재야세력의 민중선동 시도’라고 미국 정부에 설명한 사실도 드러났다.
6일 외교부가 공개한 비밀해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87년 5월 초 미국을 방문하는 이기백 국방부 장관을 통해 호헌조치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친서를 보냈다. 친서에서 “정권교체기에 야기된 국내 불안은 동맹의 이익과 서울올림픽 성공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평화롭고 질서 있는 정권 이양을 위한 나의 노력을 지지해달라”고 강조했다.
이보다 넉 달 전인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두환 정권 퇴진과 대통령선거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그해 4월 13일 '직선제로의 개헌은 불가하고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이 같은 입장을 레이건 대통령에게도 고스란히 전달한 것이다.
이에 앞서 다양한 외교채널로 미국 측에 호헌 조치의 불가피성을 강변했다. 최광수 외무장관은 호헌 조치 발표 전날 제임스 릴리 주한미국대사를 만나 “야당의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국회에서 합의 개헌은 불가능하며 88서울올림픽 때까지 개헌 논의를 유보한다”는 입장을 전했고, 김경원 주미대사에게도 “미 정부가 국내 시국을 올바로 인식하고 긍정적 반응을 보이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미 정부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 달여가 지난 6월 19일에 보낸 답신을 통해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TV 및 라디오의 균형된 보도는 자유선거에 대한 당신의 공약을 실천하는 데 필수적”이라며 우회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했다.
전두환 정권은 또 87년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예정된 ‘박종철 열사 범국민 추도식’과 관련해 미 측에 재야세력의 선전선동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김경원 주미대사는 추도식 하루 전날 마이클 아마코스트 미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나 “대학생(박종철) 사망사건과 관련해 대통령 각하께서 내무장관 해임조치, 유감 표시, 경찰 책임자 처벌, 향후 인권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즉각 취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재야세력의 추도식을 빙자해 민중선동을 획책하는 것은 사망사건을 악용해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조성하려는 저의로밖에 볼 수 없고 당국은 이를 방치할 수 없다”며 무력 개입을 예고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리처드 시프터 미 인권 차관보가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한미 경찰 당국 간 수사훈련 교류’를 제안한 사실도 드러났다. 시프터 차관보는 87년 2월 6일 김경원 주미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이번 사건으로 한국이 국제적 손실을 가지는 면도 없지 않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한국 경찰 간부가 미국을 방문해 미 연방수사국(FBI) 등 경찰제도 및 수사방법 등을 시찰한다면 한국의 수사방법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