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를 열어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를 펼친다. 무제는 조조의 시호다. ‘권격참우(權擊斬羽), 전기수(傳其首)’라는 기록이 있다. 서기 220년 봄 조조가 뤄양에 이르렀다. 손권이 관우를 공격해 참수하고 그 수급을 보내왔다는 내용이다. 조조는 무덤을 짓고 장사를 지냈다. 세월이 흘러 백성은 물론 황실도 우상으로 대접했다. 뤄양 남쪽에 위치한 관림(關林)으로 간다. 1592년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지금의 골격을 갖췄다. 성인으로 추앙하며 성역으로 만들었다.
1791년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규모가 커졌다. 대문이 만들어졌다. 붉은 팔자 담장에 전서로 쓴 충의(忠義)와 인용(仁勇)이 보인다. 충성과 의리, 인자하고 용감한 관우는 명나라 소설이 만든 이미지다. 독자가 보기에 완벽한 인물이었다. 명나라 시대 대리석으로 만든 사자가 대문을 지키고 있다. 볼록 튀어나온 금빛 문정(門釘)이 대문에 박혀있다. 가로와 세로 9줄로 모두 81개다. 황제나 제왕이 거주하는 공간의 격식이다. 관우 무덤을 찾은 청나라 강희제가 충의신무관성대제림(忠義神武關聖大帝林)이란 봉호를 하사했다. 관림이라 불렀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충의와 인용을 쓴 깃발이 펄럭인다. 옛날 복장으로 갈아입고 병기 들고 삼국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관우가 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이자 돈벌이다. 처음 지을 당시엔 대문이었는데, 바깥에 대문이 생겨 의문(儀門)이 됐다.
철로 만든 사자 두 마리가 도열해 있다. 받침대 부분에 글자를 새겼다. 사당이 건축되고 5년 후 뤄양의 선남선녀가 뜻을 모아 제작했다. 사자 한 쌍 무게가 3,000여 근이라 했다. 관우 무덤 앞에 만들었다고 적어서 도망가지도 못했다. 제작 연도 및 날짜도 있다. 관우에 대한 존경이었다. 1.5톤의 무게만큼 육중하게 500년 세월을 지켰다.
의문을 통과하니 너비 4m, 길이 35m의 통로가 이어진다. 양쪽에 사자가 떼로 등장한다. 돌로 만든 사자가 52개씩 모두 104개가 도열해 있다. 석사어도(石獅御道)라 한다. 사당 건립 27년 후 뤄양 상인들이 기금을 모아 만들었다. 사업이 번창하고 재물이 확충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담았다. 어느 순간 민간 신앙의 주인공이 됐다. 붉은 리본으로 몸과 다리를 감싸고 있다. 전쟁터처럼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어지간히 야단이다 싶다. 두 그루의 측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왼쪽 용수백(龍首柏)과 오른쪽 봉미백(鳳尾柏)이다. 용과 봉황에 감정이입하고 있다. 나무도 위치를 잘 잡으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
제사를 지내는 배전(拜殿)이 나온다. 대전과 딱 붙어있다. 향불이 자욱하다. 연기 사이로 대전에 앉은 관우가 반짝거린다. 웅장한 기세가 높고도 높다는 기장숭고(氣壯嵩高) 편액이 보인다. 평가를 하사한 사람은 서태후다. 서양 8개 연합국을 피해 도피했다가 귀경하는 길이었다. 용문석굴과 함께 관림을 찾았다. 관우에게 분향한 후 현장에서 직접 썼다.
고개 들어 더 위쪽을 바라보니 성령우삭(聲靈於鑠)이 걸려있다. 건륭제가 방문 후 친필을 남겼다. 빛이 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는 말이다. 금속을 녹이는 삭(鑠)에는 빛나는 모양이란 뜻도 있다. 어려운 말을 써서 황제는 체면을 세웠다.
대전을 계성전(啓聖殿)이라 부른다. 전도양양하고 모범인 성인이란 뜻 정도다. 보통명사보다는 별명으로 예우하니 기억하기 좋다. 관우는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찬란하다. 황제의 친필에 꼭 어울린다. 전 세계 어느 사당의 관우도 이렇게 반짝거리는 모습은 없다. 유일무이하다. 황제처럼 12줄 면류관을 쓰고 자수가 화려한 비단 용포를 입었다. 북두칠성이 그려진 칠성판(七星板)을 들고 있다. 앉은키가 6m가량이다.
왕보와 요화가 보좌하고 있다.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주창과 관인을 받들고 있는 관평도 있다. 형주를 지키던 관우는 오나라 여몽의 계략에 빠져 전투에서 패배한다. 전투력 뛰어난 최강의 장수가 아니란 말인가? 매복에 조심하라는 왕보의 권유를 듣지 않고 맥성에서 탈출하다 체포돼 관평과 함께 참수된다. 주군이 사망하자 성을 지키던 주창과 왕보도 자살한다. 요화는 거짓 투항 후 노모와 함께 탈출한다. 관우는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었다. 백성이며 독자는 마치 자신의 신세인 양 슬퍼했다. 점점 신앙의 대상이 됐다.
대전 뒤는 재신전(財神殿)이다. 언제부터 관우가 재신이 됐는지 명확하지 않다. 명나라 중기에 이르러 상업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한다. 해와 달처럼 그 빛이 드러난다는 광소일월(光昭日月)이 걸렸다. 서태후와 함께 왔던 광서제가 썼다.
관우를 중심으로 주창과 관평이 있다. 재물과 이익을 불러온다는 동자 둘이 나란히 붙어있다. 재신전 왼쪽 건물은 삼국지의 오호장군을 위한 오호전이다. 오른쪽에는 관우 부인 호씨와 아들 관흥, 딸 관봉을 위한 성모전이 있다. 관흥은 제갈량의 총애를 받고 북벌에 참여한다. 관봉은 손권이 사돈을 맺자고 했던 딸이다. 관우가 거절했다. 참으로 혼란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래서 오히려 신이 됐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재신전 뒤는 침전인 춘추전이다.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들고 있다. 정사 삼국지에 대한 배송지 주석에 따르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다. 공자가 편찬했다는 역사서인 춘추에 대한 주석서로 노나라 학자 좌구명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사에 언급됐다면 관우는 나름 역사에 정통했을 법하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다. 밤새 촛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는 장면이 떠오른다.
무덤 앞이다. 너비 10m, 높이 6m에 이르는 패방이 있다. 관우의 작위를 적은 한수정후묘(漢壽亭侯墓)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묘원 건설 책임자인 흠차태감 호빈이 썼다. 한발 뒤에 중앙완재(中央宛在) 패방이 붙어 있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학자 고호의 필체에서 가져왔다. 중앙은 관우의 머리(수급)을 뜻하며 의연하게 묻혀 있다는 뜻이다. 패방과 무덤 사이에 팔각정이 있다. 4.8m의 비석을 품고 있다.
비문에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림(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林)이라 새겼다. 강희제가 세운 비석을 보호하려고 건륭제가 세운 정자라 한다.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 강희제보다 앞선 순치제가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를 하사했다. 강희제는 따로 봉호를 하지 않았다. 옹정제를 건너 건륭제는 순치제의 봉호 뒷자리에 영우(靈佑)를 끼워 넣었다. 가경제는 인용(仁勇), 도광제는 위현(威顯)을 추가했다. 한참 세월이 지난 1828년에 도광제가 하사한 봉호의 비문이다. 볼수록 야릇한 설명이다.
강희제가 순치제가 내린 봉호를 비석으로 세웠을 개연성이 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나 어느 때인가 도광제 비석으로 대체됐다. 청나라 황제 중 가장 불행했던 함풍제는 호국보민(護國保民)을 꽁무니에 붙였다. 아편전쟁 패배 이후 태평천국 민란으로 고통이 극한에 이르자, 힘을 모아 평정을 찾아달라는 의미에서 정성수정(精誠綏靖)을 추가했다. 동치제는 도와달라고 익찬(翊贊), 광서제는 제발 덕을 베풀어달라고 선덕(宣德)을 말미에 넣었다. 8자로 시작해 227년이 흘러 26자가 됐다. 관우에 대한 예찬이 길어지고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마지막 황제 선통제는 봉호를 내릴 겨를조차 없었다.
무덤 높이가 17m에 이른다. 면적은 2,600㎡이니 아주 큰 편이다. 담장 따라 한 바퀴 돌아본다. 무덤 위로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관림은 숲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인의 무덤을 말한다. 공자 무덤은 공림(孔林)이다.
앞으로 돌아오니 무덤 입구인 종령처(鍾靈處)가 보인다. 묘문에 작은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다. 동전이 딱 들어갈만한 크기다. 마침 중국인 여행객을 인솔한 가이드가 열심히 떠든다. 동전을 넣어보라는 말이다. 왼쪽에 넣으면 평안이 보장되고 오른쪽에 넣으면 재물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두 구멍에 모두 넣어도 무방하다고 덧붙인다. 수급에 귀는 달렸으니 동전 떨어지는 소리는 들을 수 있겠다. 관우가 아니라면 어찌 무덤 앞에서 웃음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뤄양 시내에 중국 최초의 불교 사원 백마사(白馬寺)가 있다. 녹림군 민란에 가담한 유수가 서기 25년 나라를 건국했다. 역사에서 후한(後漢)이라 한다. 시안 동쪽 뤄양에 도읍을 정해 동한(東漢)이기도 하다. 두 번째 황제인 효명제(보통 한명제라 함)가 어느 날 꿈을 꾼다. 황제의 꿈이니 예사롭지 않았다. 정사인 위서가 기록했다.
천축 가는 길에 대월지를 지났다. 기원전 2세기에 건국한 중앙아시아 나라다. 두 명의 인도 승려를 만났다. 섭마등과 축법란이 한나라로 향했다. 석가모니 입상과 사십이장경을 백마에 싣고 왔다. 산문 옆에 돌을 깎아 만든 두 마리 백마가 있다. 당시 모양 그대로일 리가 없다.
북송 시대 학자 위함신의 무덤을 지키던 백마였다. 1935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꿈은 부처에 대한 찬양이었고 승려가 왔다. 두 승려는 외빈 숙소이자 외교 업무 관청인 홍려시(鴻臚寺)에 머물렀다. 자연스레 백마사라 고쳐 불렀다. 불경 번역과 설법으로 평생을 보냈다. 관청이 종교 사원이란 뜻으로 변모했다.
산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좁은 길이 나온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눠 두 승려의 묘원이 조성돼 있다. 앞쪽으로 가면 천왕전이 나온다. 전각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중건을 거듭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수차례 보수했다. 불상은 꼭 그렇지 않았다. 배가 나오고 만면의 미소를 띠고 있는 미륵불이 앉아있다. 명나라 시대 유물이다. 다른 전각의 불상처럼 외부에서 이전해 왔다. 최근에 제작한 듯한 사대천왕의 보호를 받으며 앉아 있다. 미륵불과 등을 맞대고 위태보살이 위치하고 있다.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다. 중국 사원에 늘 등장한다. 칼을 들고 머리나 배에 거울을 달고 있다. 위태보살을 보고 뒤로 돌아서면 대불전이다. 보통 천왕전 다음에 대웅전이 위치한다. 백마사는 대불전이 중간에 끼어있다. 문 사이로 석가모니가 보인다. 양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제자인 가섭과 아난과 함께 두 명의 공양 보살이 있다. 역시 뒷면에 관음보살이 있다.
대불전을 지나면 대웅전이다. 가로 5칸, 세로 3칸 크기로 평범한 편이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봉공돼 있다. 수호신인 위태(韋馱)와 위력(韋力)이 두 분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다. 양쪽 벽에 십팔나한이 도열해 있다. 모두 23존이다. 딱 봐도 흔한 작품이 아니다. 원나라 시대 전통 칠공예로 제작된 협저(夾紵) 불상이다. 점토와 모래로 형체를 만들고 모시풀을 입힌다. 옻칠을 반복해 두텁게 만들고 금칠을 거쳐 채색한다. 원나라 이후 잃어버린 공예 기법이다. 현재 거의 남지 않은 국가급 보물이다.
대웅보전에서 보(寶)를 뺐다. 보물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라 한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66년 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타파하는 파사구(破四舊) 운동이 시작됐다. 홍위병이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불상은 물론이고 인도 승려가 싣고 온 사십이장경까지 모조리 불타버렸다.
1970년 캄보디아 국가수반 시아누크가 중국에 왔다. 마침 우파 쿠데타가 발생해 귀국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중국을 제2의 고향이라 자주 언급한 시아누크는 지방도 많이 돌아다녔다. 불교 국가의 독실한 신도다. 백마사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이지만 내세울 만한 유물이 없었던 백마사 입장이 난처해졌다.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부총리 리센년이 최종 결제를 했다. 국가문물국과 베이징 고궁이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황태후가 거주하던 자녕궁(慈寧宮) 후원의 대불당 불상이 희생양이 됐다. 보물을 모두 가져오는데 3개월이 걸렸다. 무사히 시아누크가 다녀갔다. 임시로 빌리자 약조하고 가져왔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았다. 리센년이 모른 체했다. 원나라 시대 희귀 보물이 중국 최초의 사원에 고스란히 남은 배경이다.
가장 뒤에 청량대(清涼臺)가 있다. 효명제가 태자 시절 공부하던 장소다. 두 승려에게 내어줬다.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이층 전각 비로각(毗盧閣)이 있다. 부처의 법신인 비로자나의 준말이다. 1층 편액이 사굴(獅窟)이다. 사자 굴이 아니라, 동물의 왕 사자처럼 부처가 사람의 왕이라는 메시지다. 부처는 출생하자마자 하늘과 땅을 향해 손짓하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소리쳤다. 사자후를 뿜었다. 주지가 거주하는 전각을 사굴이라 한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이다. 시선이 불상과 전각에서 벗어나니 나무가 보인다. 풀도 무성하다. 가사 입고 사원을 거니는 승려와 마주친다. 만행이 휩쓸고 지나간 시절을 돌아본다. 아득하고 우울하다. 그때 승려들 마음을 헤아리기도, 상상하기도 어렵다. 황제가 머물던 고궁의 진귀한 유물이 왔다. 제자리를 지켜야 했던 불상은 이미 재가 됐건만 부처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역사 안에는 2,000년 전 백마의 호흡도 느껴진다. 불행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하물며 문화혁명의 광풍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