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선 '무조건 사형'이 사법 정신이었다. △반역 △살인 △테러 △50g 이상 마약 소지 △마약 밀매 등 11개 중범죄를 저지르면 무조건 사형 선고를 내렸다. "사형제를 폐지하는 국제 흐름에 역행하는 인권 침해"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사형 선고 의무제'를 폐지하기로 했다. 다만 사형제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4일 AFP통신 등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하원은 법원이 형법에 따라 형량을 선고하게 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의 처리와 국왕의 재가가 남아 있지만, 정부 의지가 커서 입법이 확실시된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말레이시아는 다민족·다문화·다종교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이슬람 교리를 강화하기 위해 사형을 적극적으로 집행했다. 국제사회와 인권단체들의 비판에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8년 사형 집행을 전면 유예했는데, 5년 만에 한 발 더 나아간 셈이다.
람카르팔 싱 법무부 차관은 4일 “말레이시아 형사 사법 제도는 보편적 인권 기준을 따르고 있다”며 “사형이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이며 범죄를 효과적으로 억제하지 못한 점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중범죄자에겐 법원이 ‘12대 이상의 태형과 최대 40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게 됐다. 말레이시아 형법은 태형을 최대 24대로 제한한다. 사형수로 복역 중인 1,318명이 새 법의 적용을 받을 전망이다. 영국 가디언은 “이 중 500명은 외국인이며 전체의 60%는 마약 사범”이라고 전했다.
말레이시아가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탈바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간 중범죄자를 무조건 사형대에 세웠다면, 앞으로는 법원이 사형 외에 징역·태형이란 ‘대안’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말레이시아 사회는 들썩였다. 강력 범죄 피해자들의 유가족은 거세게 반발했다. 2009년 강간 살인으로 17세 딸을 잃은 탄 시우 링은 의회 로비에서 딸의 영정사진을 들고 “살인자만 자유로워지는 판결”이라고 흐느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전했다.
인권 단체들은 '일단 환영'에 나섰다. 향후 사형제 완전 폐지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며 환영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다만 대안으로 국제법에 금지된 태형이 제시된 데 대해선 여전히 우려했다. 카트리나 조렌 말리마우브 국제앰네스티 말레이시아 사무총장은 “태형 등 대체 형벌 역시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굴욕적인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회원국이 여전히 사형을 집행하는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진보적 행보라는 시각도 있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미얀마는 사형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지난해 마약 밀매범 11명을, 미얀마는 군부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가 4명을 처형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말레이시아의 움직임이 이웃 국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