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온라인 쇼핑몰의 요청으로 장애인용 컴퓨터 마우스 판촉 회의를 했다. 손이 절단되어 있거나 손힘이 없거나 손이 마비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이다. 특이한 상품인 만큼 이 제품을 어떻게 소개할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오갔다. 누군가가 사내 장애 직원들에게 마우스를 주고 사용 후기를 받으면 구매자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아무리 직원이라고 해도 장애인 당사자인데… 후기를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는 걸 꺼려하지 않을까요?" 내 답은 이랬다.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 같으면 적극적으로 나설 것 같아요. 많은 장애인들은 삶을 편리하게 해 주는 새로운 기기나 보조기기를 쓴 후엔 기회가 있다면 주변에 알려 주려는 편이에요. 정보 찾다가 허탕 치는 일이 많으니까요."
진짜 그렇다. 내가 예전 회사에서 장애용품 온라인 쇼핑 코너를 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정보 갈증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화장실 턱 때문에 휠체어를 탄 딸이 손만 씻으려 해도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6만 원 수준의 '실내 경사로'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사서 화장실에 놓은 후 삶의 질이 확 높아진 걸 체감해서다. 내가 몇 시간씩 검색해 알아낸 '실내 경사로'란 키워드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장애용품에 대한 정보가 너무 드물다 보니 장애인들은 집 밖을 나서면 질문공세를 받기 일쑤다. 딸과 외출하면 딸과 나에게 휠체어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많다. 친절하게 답해 주려고 애쓴다. 질문하는 사람 목소리에 묻은 간절함이 동병상련처럼 느껴지고, 딸이 쓰고 있는 전동키트(수동휠체어에 부착하는 전동모터) 덕분에 아이가 혼자 등하교할 수 있었을 때의 그 감격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순간 10대 딸아이는 휠체어 정보를 물어보는 어른들에게 '장애 선배'가 된다.
장애에 있어 '선배'라는 개념은 비장애인 세계에서의 개념과 다르다. 우선 나이와 별로 관계가 없다. 막 장애를 갖게 된 성인 중도장애인들에게 10년째 휠체어를 타고 있으며 다양한 보조기기를 써 본 내 딸은 '선배'가 될 수 있다.
협동조합 '무의'를 처음 설립했을 때 목표는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딸이 의지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비장애인들과 함께 휠체어 접근 가능 지도를 만들면서 '내 딸 편'을 많이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커 가며 여성이자 장애청소년으로서, 엄마도 아빠도 답해 줄 수 없는 고민을 상의할 수 있는 '끈끈한 당사자 연대'를 향한 소망도 품게 됐다. 비장애인 부모가 이해하기 힘든 질문을 장애 선배에겐 편하게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MZ세대 여성장애인들과 토크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유니버셜디자인 가구 디자이너, 장애 일상을 전하는 유튜버, 휠체어를 꾸미고 대학교 앞 접근성 프로젝트를 해낸 크리에이터를 모았다. 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장애 선배'들이다. 사실 행사를 기획하고도 '반응이 얼마나 있을까' 불면증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기획 회의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제가 대학 입학할 때는 젊은 선배 여성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듣기가 어려웠어요. 이런 토크 콘서트가 10년 전에 있었다면 제 삶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토크 콘서트에 참여하는 2030 장애 여성들은 모두 자신이 기획하여 작은 성공 경험을 해 본 이들이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청중을 많이 모으기보다 청중 중 단 한 명이라도 이들 선배에게 영향 받아 '나다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렇게 또 새로운 '장애 선배'가 탄생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