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시작됐나 싶더니 벌써 반팔 티셔츠가 어울리는 여름 날씨가 됐다. 이쯤 되면 겨울바다는 옛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보름 전까지만 해도 남쪽 부산은 겨울이었다. 올해 마지막으로 겨울바다를 보기 위해 저녁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부산 사하구 다대포 해수욕장을 찾았다. 일몰 시간에 맞춰 도착한 해변에는 겨울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멍하니 흐르는 혼자만의 시간 속, 해변은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석양빛에 물들어갔다. 그러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래언덕과 뱀이 지나간 듯 모래 위 바람의 흔적들이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겨울바다의 정취를 즐기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과 함께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온몸을 때리는 강한 바람과 함께 모래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래바람은 더욱 기세등등해지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갑자기 태풍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정신은 몽롱해지고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하에 정신없이 소나무 숲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내디딘 끝에 바람 없는 곳에 도착했다. 어지러운 머리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쯤 내 몸이 온통 ‘모래 범벅’이 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흡사 사막 속에서 모래폭풍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탐험가의 몰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