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사랑과 정적 우아함 사이…'진주 귀걸이 소녀' 극과 극 감상법

입력
2023.04.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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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베르메르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올해 2월부터 6월까지 네덜란드 라익스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베르메르' 전시의 티켓 45만 장이 완전히 매진된 가운데, 지난 3월 27일, 암표 2매가 전자상거래 업체 이베이에서 2,724달러에 팔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지상 최대의 전시’라는 이번 '베르메르'전은 현존하는 총 37점 중에서 28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준비기간만 7년이 걸렸다는 이번 전시가 끝나면 다시 개별 소장자들에게 작품들이 되돌아가기 때문에 다시 또 한자리에 작품들을 모으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632년에 태어난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페르메이르 또는 버미어) 4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델프트에서만 살았다. 그는 약 200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고, 남겨진 기록이나 자료가 매우 적다. 그나마 확인된 것은 그림가게와 여관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15명의 자녀 중 살아남은 11명과 평생을 살았다는 것, 그가 사망한 후 밀린 빚을 갚기 위해 아내가 집안의 모든 집기를 처분해야 했다는 기록 정도다. 많은 미스터리한 예술가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베르메르는 거대한 양파다. 까면 깔수록 흥미롭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세 가지 논란들, 그리고 각 논란과 관련된 세 개의 영화에 주목해보자.




논란 1. 베르메르는 커닝(부정행위)으로 그림을 그렸는가? – 다큐멘터리 '팀의 베르메르'

17세기 화가 베르메르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델프트 사람들에게 화가로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어디서 누구에게 그림 교육을 받았는지, 제자는 두었는지 기록이 없다. 동시대의 몇몇 화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사진기가 없던 시대의 사진이라 불릴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와 특유의 정적인 느낌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동시에 수수께끼였다.

그의 극사실주의적 그림은 천재적인 붓놀림의 결과라기보다는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장치를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저서 '명화의 비밀'에서 ‘우유를 따르는 여인’ 멀리 뒤쪽 벽면에 걸린 바구니는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앞쪽 빵은 마치 카메라 아웃포커싱처럼 흐릿하게 그려진 점에 주목하면서, 베르메르가 평소 친분이 있던 현미경 개발자 안톤 판 레벤후크의 도움을 받아 만든 특수한 장치로 그렸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러한 호크니의 주장을 직접 증명하겠다고 나선 이가 있었으니 3D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개발자이자 발명가인 팀 제니슨이다. 그는 5년 동안 베르메르의 ‘음악수업’ 작품을 똑같이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기획, 실험했는데, 그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현재 넷플릭스에 공개 중인 '팀의 베르메르'(2013년)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팀 제니슨은 평생 붓으로 그림을 그려본 적 없었다는 점이다. 오로지 장치를 이용하여 보이는 그대로 따라 칠했음에도 베르메르 특유의 풍부한 색채의 정교한 그림을 재현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베르메르가 '실력 없이 장치를 이용해서 그림을 제작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손목 부분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당시 화가들이 정확한 원근법을 위해 소실점 위치에 핀을 꽂고 거기에 줄을 이어 밑그림을 그렸던 기법으로 베르메르가 전통적 방식으로 그렸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또한 빚 청산을 위해 델프트 시청에서 작성한 그의 유품 목록에는 특수장치가 있는 밀실을 특정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물론 그의 아내가 비밀로 하기 위해 공개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심증이 물증이 될 수는 없다. 설령 베르메르가 장치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해도 인공지능 이미지 생성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그가 ‘연출’한 화면 구도, 인물, 색채 등이 자아내는 정서에 감동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논란 2. 왜 가짜 베르메르 그림이 많은가? – 영화 '라스트 베르메르'

베르메르는 1년에 겨우 두세 점만 완성했다. 느린 작업 속도의 원인이 꼼꼼함 때문이었는지, 소리지르며 뛰어다녔을 11명의 아이들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작품 수가 적다는 희소성, 극사실적 그림을 그렸다는 화제성, 보석을 갈아 만든 비싼 안료를 사용한 특이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 속 여인들이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감상성 때문에 베르메르는 표절과 위작의 표적이 되었다. 17세기의 베르메르가 19세기 중반에 와서 알려지게 된 사건에도 누군가의 사기 행각이 있었다. 베르메르의 작품 중 가장 사이즈가 큰 ‘회화의 알레고리’는 델프트 출신의 다른 화가 이름으로 거래되었다. 1860년, 독일의 미술사학자 구스타프 바겐이 서명 부분을 이상하게 여겨 바니시 덧칠을 제거했더니 벽면 지도 속에 베르메르의 서명이 드러났다. 누군가가 더 높은 그림 값을 받기 위해 당시 더 유명했던 화가의 서명으로 위조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면서 거꾸로 다른 이들의 작품이 베르메르의 것으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베르메르 작품을 둘러싼 위작 논란의 정점에는 2008년 BBC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기꾼'이라고 불렀던 ‘한 판 메이헤른’이 있다. 2020년에 공개된 '라스트 베르메르'는 메이헤른의 위작 사건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메이헤른의 재판 장면을 지나치게 각색했지만 베르메르를 둘러싼 당시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메이헤른은 화가로 인정받지 못한 유흥업소 사장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이 독일군 약탈창고에 있던 작품들을 회수하면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오래된 그림 하나가 있었는데, 독일군이 메이헤른에게서 샀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17세기 화가 베르메르의 초기 작품이라고 외쳤고 메이헤른은 '국보를 독일군에게 팔아먹은 매국노'로 재판에 기소되었다. 사형 위기에 처하게 된 메이헤른은 그제서야 자신이 작품을 위조했다고 자백했고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20세기 초 여러 미술관들이 “우리도 새로운 베르메르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앞다투어 경쟁하듯 발표했을 정도로 새로운 베르메르 그림이 ‘발견’되던 때였다. 대부분 메이헤른의 위작들이었다.

전문가들도 “틀림없는 베르메르 작품”이라고 법정에서 확신에 차서 외쳤을 만큼 메이헤른의 위작술은 정교했다. 결국 증거자료로 제출하기 위해 감옥 안에서 수개월 동안 작업하여 위작 재현에 성공한 메이헤른은 스스로 자신의 사기를 입증함으로서 사형을 면하고 사기죄로 1년형을 받았다. 역대급 매국노에서 '위작을 독일군에게 팔아 독일의 군비를 축내게 도와준 애국자'로 변신하는 반전 이야기에서 가장 큰 반전은 그가 독일군 헤르만 괴링에게 위작을 팔며 받은 돈이 모두 위조지폐였다는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논란 3. 누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편집했는가? –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베르메르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 준 그림은 단연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다. 소설과 영화에서는 베르메르 집 하녀의 초상화로 나오지만, 이 그림은 누군가의 초상화가 아닌 인물 묘사 훈련을 위해 그려진 ‘트로니’로서 가상의 인물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베르메르가 그린 여인들은 창가에 서서 음식을 만들거나, 편지를 읽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소박하고 따뜻한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금지된 사랑을 갈망하는 여인들의 아슬아슬한 도발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 있는 풋워머(17세기 여인들의 개인 온열기구)와 타일에 그려진 큐피드, 정액을 상징하는 흰색 술병과 우유, 성(性)을 상징하는 과일 등을 배치한 베르메르의 의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다가 '열린 창문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가 복원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엑스레이(X-ray) 촬영 결과, 아무것도 없던 벽면에는 커다란 큐피드 그림이 있음이 밝혀졌다. 처음에는 베르메르 본인이 지워냈을 것으로 여겼다가, 2017년의 정밀분석 결과 베르메르의 사망 몇 십년 후의 덧칠로 드러났다. 미술관 측은 여러 고민과 논란 끝에 원작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복원된 작품이 바로 이번 라익스미술관 '베르메르'전에 최초로 공개 중이다. 벽면의 큐피드와 가면, 그리고 침대 위 과일은 도상적으로 금지된 사랑, 즉 불륜을 뜻한다. 이로서 학계는 베르메르가 성적인 메시지를 담았다는 해석이 맞다고 보고 있다. 이 복원 작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원작을 훼손했는지 모르지만 (렘브란트 작품으로 보이기 위한 위조설도 있다), 가려진 벽면이 더 아름답다는 의견이 있었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정적인 우아함’으로 대표되었던 베르메르를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나오는 베르메르처럼 점잖고 우아한 정적인 느낌의 예술가를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화가의 원래 의도가 진실이라면, 커다란 큐피드를 지워낸 누군가의 의도는 거짓인가? 형식미를 위해 지워낸 걸까, 아니면 불륜을 암시하는 내용이 싫어서 지워낸 것일까? 가려진 진실이 더 아름다울 때 (혹은 그렇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때로는 편집과 각색이 더 좋은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작의 진실은 다른 방향일 수 있다. 이 문제는 최근 화제가 되었던 영국의 소설가 로알드 달 책의 편집 논란과 맞닿아 있다. 지난 2월 출판사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신체 및 인종 표현과 관련한 단어들을 바꾸고 캐릭터마저 수정했다. 독자층인 아이들을 위한다는 이유다. 미술과 문학을 단순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창작자의 작품을 ‘예술’로 보는지, 아니면 ‘역사적 유물’로 보는지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모조품 귀걸이를 한 가짜 소녀라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감동할 때, 비록 불륜 여성이라지만 그녀의 조용히 소용돌이치는 긴장감을 함께 느낄 때, 우리는 창작자의 진실과 틀림없이 만난다고 믿는다.






미술교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