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팅을 해야 한다는 건 그만큼 맛있는 음식이 있거나 예쁜 사진을 남길 포토존이 있는 곳이란 뜻이죠. 친구들이랑 만날 땐 30분 정도 웨이팅은 기본으로 생각하고 동선을 정해요."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몰의 '노티드 월드'에서 만난 엄주희(21)씨는 1시간 30분 '웨이팅' 끝에 음료 두 잔과 크림 도넛 두 개를 받아 들었다. 노티드 월드는 유명 디저트 브랜드인 노티드가 340평 규모로 만든 초대형 플래그십 스토어. 한정판 컵케이크와 도넛, 음료를 파는 카페로 포토존과 시원한 석촌호수 풍광을 볼 수 있어 입소문을 탔다. 지난달 31일 처음 문을 열자마자 오픈런(문 열기 전부터 기다리고 시작되자마자 달려가 물건을 사는 것)의 성지가 됐다.
엄씨도 평일인 이날 오픈 시간인 10시 30분에 맞춰 매장에 왔지만 이미 앞엔 3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그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포토존에서 친구와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 윤혜준(21)씨는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85점 정도"라면서 "인테리어도 예쁘고 석촌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아 창가 자리만 보장된다면 또 오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웨이팅은 하나의 문화이자 놀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오랜 기다림 끝에 입장해 건진 인증샷과 후기를 공유하며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시글이 올라온다. 웨이팅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자체가 자기 시간을 투자해도 실패하지 않을 핫플레이스임을 보증한다는 게 이들의 믿음이다.
젊은 세대는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대신 기다리는 시간에 즐길거리를 찾는다. 그래서 '0차 문화'라는 새로운 트렌드도 생겼다. 어차피 1차로 가려던 맛집이나 굿즈숍은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니 현장에서 입장 대기를 걸어놓고 기다리는 동안 머무를 다른 카페, 식당 등(0차)을 미리 정해두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재흔 대학내일20대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앱 등을 통한 원격 줄 서기가 가능해지면서 '0차 문화'가 생겼다"면서 "기다리는 시간에 갈 만한 공간에 대한 정보까지 미리 찾고 동선을 짜두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이 웨이팅을 즐기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곳이 인기다. 요즘 핫플레이스엔 인증샷을 남길 만한 포토존이나 포토부스를 마련하거나 기다려야만 받을 수 있는 굿즈가 있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인기 캐릭터 '최고심'의 팝업 스토어 '건강이 최고심'에선 웨이팅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대기표인 '문진표'와 포스터를 나눠준다. 문진표는 방문객들의 건강을 응원하고 고민을 해소해 주는 곳이라는 콘셉트에 맞춘 굿즈다. 문진표 왼쪽 칸에 방문객이 고민을 적은 뒤 오른쪽에는 '님이 최고라네요', '걱정할 필요 없다네' 등 스토어 안에 비치된 격려 문구 도장을 찍어 완성한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 2시간을 기다려 숍을 방문했다는 직장인 김모(30)씨는 "여기에서만 받을 수 있는 문진표와 포스터 때문에 꼭 방문하고 싶었다"면서 "포스터는 고이 간직해 방 벽면에 붙여 두었다"고 자랑했다.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의 기저에는 기다림으로만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을 향한 열망이 있다. 실제로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복수응답)에 따르면 오픈런을 시도하는 건 제품·매장의 희소가치 영향(59.4%)이라는 응답과 남들보다 먼저 구매했다는 성취감 때문(45.8%)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일상 기록 블로그를 운영하는 김모(31)씨는 "친한 친구들을 만날 땐 무조건 웨이팅이 오래 걸리는 곳을 찾아 '도장 깨기'(유명한 도장의 실력자를 꺾듯 특정 분야에서 단계적으로 기록을 세우는 일)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김씨가 도장 깨기를 한 곳은 스페인 감자칩 브랜드 보닐라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 용산구에 오픈한 '보닐라츄러스'. 이곳은 '아시아 최초'라는 희소성으로 가오픈 기간부터 방문객이 몰렸다. 김씨는 "1시간 45분 정도 기다렸지만 만족스러운 경험이어서 다음 날 또 갔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성취감은 'SNS 업로드'로 비로소 완성된다. 김씨도 "SNS에 웨이팅 후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올려 은근히 자랑하거나 꿀팁을 공유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해시태그(#)에도 그런 경향성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19일 기준 인스타그램에서 '웨이팅'을 해시태그로 건 게시물만 18만 개. 웨이팅과 관련된 또 다른 단어인 '오픈런'은 8만6,000개, '가오픈'은 23만4,000개에 이른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웨이팅 후 흔히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득템'(좋은 것을 얻었다는 뜻)인데 어렵게 얻은 기회라는 점이 큰 만족을 주는 것"이라면서 "이 만족감을 취향을 전시하는 공간인 SNS에 자랑하고 싶은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존의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적 정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게 웨이팅 문화다. 웨이팅 문화가 유행하는 현상은 웨이팅 자체를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보상이 돌아오는 것으로 여기는 요즘 젊은이들의 가치관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웨이팅은 순서대로 원하는 것을 획득한다는 규칙이 있는, 일종의 형평성이 보장된 행위"라면서 "이 때문에 요즘 세대들이 긴 시간의 기다림도 수용할 만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이어 "'노력하지 않고 얻었다'는 편법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오래 기다려서 원하는 걸 얻었다'는 게 자랑이 된 셈"라고 덧붙였다.
타인의 경험을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근거로 삼고자 하는 심리도 반영한다. "오래 기다렸지만 만족스러웠다"는 타인의 후기는 곧 기다린 만큼의 결과를 보장받는 근거가 된다. 요즘 세대가 열정적으로 방문 후기를 미리 찾아보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노티드 월드 오픈런 후기를 블로그에 올린 김유진(24)씨도 "후기 업로드 당일부터 방문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고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본 주변 친구들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즐길거리는 많은지 등 정보를 물어봤다"고 말했다. 이재흔 수석연구원은 "웨이팅을 하는 곳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검증을 받아 시간을 투자해도 실패하지 않을 만한 곳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웨이팅을 마다하지 않게 된 경향이 생겼다"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