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이 남긴 '인류 최초 세계사' '집사', 세계 세 번째로 완역한 김호동 명예교수

입력
2023.04.03 04:30
20면
제5권 '이슬람의 제왕' 출간하며
21년에 걸친 고전 번역 작업 마무리

"그간 돌덩어리가 목에 매달려 있는 듯했는데, 아주 큰 짐을 덜어낸 기분입니다."

지난달 31일 경기 양평군의 카페에서 만난 중앙아시아사 연구 석학 김호동(69) 서울대 명예교수는 무척 후련한 표정이었다. 최근 '세계 최초의 세계사'로 일컬어지는 역사학 고전 '집사(集史)'의 마지막 권인 '이슬람의 제왕'을 출간하며, 장장 21년에 걸친 번역 작업을 완성하면서다. 러시아, 미국에 이은 세계 세 번째 완역이다.

13세기에 출현한 몽골제국은 서유럽과 인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유라시아 전체를 통합한 말 그대로 '세계 제국'이었다. 그 영향권이 태평양에서 지중해에 이를 정도였으니 몽골제국의 역사가 그 자체로 '세계사'인 셈이다. 지금의 이란 출신 재상 라시드 앗 딘이 칸의 명으로 편찬한 '집사'는 몽골제국 군주들의 연대기를 종합한 것 이상으로 중국, 인도, 아랍, 튀르크, 유럽, 유대 등 주변 모든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집대성한 독보적 사료다. 집사 이전에 쓰여진 사마천의 '사기'나 투키디데스의 '역사'는 모두 지역사에 불과하다.

"오늘날 인구 300만 명의 세계적 위상이 강하지 못한 '몽골'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시 몽골은 지금으로 치면 미국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친 대제국이었습니다. 각 지역의 학자, 종교인, 정치가가 모이는 등 인류 역사상 과거에 없었던 대교류가 일어나면서 이런 책이 쓰여질 수 있었던 거죠."

제3부로 구성된 '집사' 중 현존하는 부분은 제1부 전체와 제2부의 2권뿐이다. 이번 완역본은 제1부를 번역한 것이다. 2002년 '부족지'를 시작으로 '칭기즈칸기(2003)' '칸의 후예들(2005)'을 차례로 세상에 내보낸 뒤, 긴 휴지기를 거쳐 '일 칸들의 역사(2018)'와 '이슬람의 제왕(2023)'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었다. 그사이 40대 중년이었던 학자는 어느덧 은퇴한 원로가 됐다.

"10년 정도면 끝나지 않을까 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정년을 눈앞에 앞두고선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다시 몰두했죠."

번역을 위해서는 페르시아어 구사 능력뿐 아니라 튀르크어와 몽골어, 한자 어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하고, 몽골제국사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했다. 중앙아시아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김 교수의 작업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된 이유다.

좋은 사본(寫本)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다. 이번 우리말 완역본은 학계에서 최상의 사본으로 인정받는 톱카프 사본을 저본으로 삼았는데, 타슈켄트·테헤란 사본까지 총 3종을 교차로 검증한 주석도 꼼꼼하게 달려 있다. 이전에는 이란어를 모르는 학자들이 러시아 번역본에 의존해 '집사'를 연구해 왔다. 몽골사 연구의 전통이 유구한 일본도 아직 일역본을 갖고 있지 않고, 중국은 러시아 번역본을 중역해 출간했을 뿐이다.

"이번에 출간된 마지막 책은 칸의 칙령을 담고 있어요. 도량형을 어떻게 할 것인지, 통행증을 복제했을 때 어떻게 회수할지 같은 전문적 내용이죠. 현대 생활에 비유하자면 '피싱 사기 대처법' '금융에 대한 특별조치법' 같은 것을 700년이 지나 번역한 거죠. 페르시아어뿐 아니라 온갖 각지의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애를 먹었습니다."

김 교수가 쉽지 않은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향후 국내 중앙유라시아사 연구의 초석을 마련하겠다는 학자적 소명의식이 있었다. 몽골제국은 물론이고 중동 지역이나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저조해 고전이나 문화적 업적이 국내에 소개될 계기가 적었던 것도 김 교수의 마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21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원로는 또 한 번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준비 중인 다음 책은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한 권으로 읽는 집사'다.

"'집사'는 인류의 '세계사적 인식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특히 중요한 고전입니다. 쉽게 접하기 힘든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일반 독자들도 접함으로써 그 세계의 이해를 바탕으로 호기심을 갖고, 더 나아가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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