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년 불문율 깨졌다"... '성관계 입막음' 트럼프, 결국 기소

입력
2023.03.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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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법 위에 없다' 미 역사상 첫 피고인 대통령"
맨해튼지검 형사 기소... 내달 4일쯤 검찰·법원 출석
13만 달러 지급 후 '기업문서 조작'... "30여개 혐의"
트럼프 "마녀사냥" 반발... 미국 사회도 뜨거운 논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피고인 전직 대통령’ 신세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됐다. 과거 성추문 은폐를 위한 입막음 대가로 거액을 지불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미 검찰이 형사 기소를 결정한 것이다. 내년 차기 미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화당 대권 주자들 중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터라, 이번 기소는 대선 레이스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워싱턴 정가는 물론, 미국 사회에도 메가톤급 파장이 일고 있다. 당장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 인사들은 “정치적 박해ㆍ보복”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230여 년에 달하는 미국 연방정부 역사에서 전ㆍ현직 대통령에 대한 첫 형사처벌인 만큼, “불문율을 깬 것” “새로운 선례가 만들어졌다” 등 다양한 평가도 나온다. 이 사건만 해도 법률적 쟁점이 첨예한 데다, 그를 겨냥한 또 다른 대형 수사도 3건이나 별도로 진행되고 있어 한동안 미 정국은 ‘트럼프 변수’로 요동치게 됐다.


맨해튼 대배심 3시간 토론 후 '기소 결정'

3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와 CNN방송 등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미 뉴욕 맨해튼 대배심은 이날 오후 2시부터 3시간의 토론을 거친 뒤 표결을 통해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기소를 결정했다. 맨해튼지검은 2016년 10월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가 “2006년 트럼프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폭로하려 했던 전직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본명 스테파니 클리퍼드)를 무마하기 위해 개인 변호사 마이클 코언을 통해 13만 달러를 건넸다는 의혹을 수사해 왔다. 이 사건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8년 대니얼스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구체적 혐의는 현재로선 확실치 않다. 공소장은 이르면 다음 주 공개될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기업 문서 조작’ 혐의 적용은 확실시된다. 코언은 트럼프 지시로 대니얼스를 만나 개인 자금으로 합의금 13만 달러를 건넸고, 향후 트럼프그룹에서 이를 포함해 총 42만 달러를 돌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전 대통령이 회사 내부 문건에 해당 금액을 ‘법률 자문 비용’으로 기재한 게 뉴욕주 법률 위반(기업 문서 조작 금지)이라는 게 검찰 수사팀 판단이다.

'선거법 위반' 최대 관심사... "공소장 혐의 30개 이상"

최대 관건은 연방선거법 위반 여부다. 기업 장부 조작은 경범죄에 불과하지만, ‘또 다른 범죄’를 감추려는 목적이었다면 중범죄로 기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입막음 돈’의 전달 시기가 대선(2016년 11월) 직전이었으므로, 당시 트럼프 후보를 위해 쓰인 ‘불법 선거자금 수수’로 볼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맨해튼지검은 이같이 판단하는 기류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CNN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공소장에는 기업사기와 관련한 30여 건의 범죄 혐의가 적시됐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내달 4일쯤 ‘피고인’ 신분으로 후속 절차에 임할 전망이다. NYT는 그의 변호인인 수전 네첼레스를 인용해 이같이 전했다. 현재 플로리다주 마러라고의 자택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검찰과의 일정 조율을 거쳐 뉴욕으로 이동해 먼저 맨해튼지검에 출두해야 한다. 지문 채취, 머그샷(범인 식별용 얼굴 사진) 촬영 등을 한 뒤 ‘형식적 체포’ 상태로 뉴욕지방법원에 출석해 공소사실 인정 여부에 답하는 ‘기소 인부 절차’를 밟게 된다. 혐의를 부인할 게 거의 100%인 만큼, 향후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되고 있다.

법정서 적법성 논란 일 듯... "미 민주주의 시험대"

이날 기소 결정 직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정치적 박해이며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선거 개입”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급진 좌파 민주당원들은 나의 대통령 취임 전부터 ‘마가(MAGAㆍ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을 파괴하려는 마녀사냥을 벌였다”고도 주장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첫 기소’라는 초유의 사건인 만큼, 논란도 뜨거워지고 있다. 우선 기업 문서 조작과 선거법 위반을 결합하는 형태의 기소는 전례가 없어, 향후 법정에서 적법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코언이 트럼프에게 등을 돌린 사실을 짚으며 “재판에서 배심원단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며 ‘무리한 기소’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NYT는 “(정치 보복을 피하기 위해) 미국의 대통령은 200년 이상 ‘기소’로부터 보호를 받았는데, 이러한 금기(taboo)가 깨지면서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올랐다”며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새로운 선례’가 생겼다”고 분석했다. 이어 맨해튼지검의 기소 결정에 대해 “트럼프의 또 다른 의혹을 수사하는 수사팀의 부담도 덜어 줬다”고 덧붙였다.

워싱턴= 정상원 특파원
김정우 기자
정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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