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 과학? '가습기살균제·천식 인과관계 부정' 옥시 논리 뜯어보니

입력
2023.04.03 12:00
10면
옥시, 친기업적 의사와 의료 자문 계약
환자 진료 정보 보내며 사(私)감정 요청
의협 "살균제 탓 천식 악화" 의견에도
옥시 측 의료인, 진료 기록 편집해 부인 
전문의들 "특정 병원 기록 배제 이례적" 
과거에도 입맛 맞는 연구 용역 의뢰 논란

옥시레킷벤키저(옥시)가 가습기살균제(PHMG)로 천식 진단을 받은 피해자와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청부 과학' 성격이 짙은 대응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옥시 측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친기업 성향으로 알려진 의사에게 자문하고 이를 재판에 활용하고 있다. 옥시와 옥시의 법률 자문을 맡은 김앤장 법률사무소(김앤장)는 2020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축소·은폐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고발되기도 했다.

옥시, 친기업 성향 의사와 '의료 자문' 계약

2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옥시 측은 최근 진행 중인 피해자와의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와 계약해 기업에 유리한 대응논리를 자문하고 이를 활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의료 자문 자체가 위법인 것은 아니지만, 기업이 특정 의사에게 별도로 의뢰해 사(私)감정을 받고 대응 논리를 세우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게 학계 의견이다.

민사소송법에 따르면, 법원은 의료소송 중 필요 시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 혹은 재판부가 지정한 병원(전문 병원 혹은 환자 진료 병원)에서 진료기록 감정(鑑定)을 받게 돼 있다. 의료 분야는 인과관계 입증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 전문가에게 진료기록 감정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은 편향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감정 의료진을 공개하지 않고 '의료감정원' 이름으로 의견서를 낸다.

옥시 측은 2019년부터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신지수(17·가명)양과 손해배상 소송 중이다. 지수는 △환경부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 △재판부가 감정을 허가한 병원(진료 병원)의 의료 감정에서 가습기살균제 사용으로 천식이 악화됐다는 점을 인정받았다. 2018년 12월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천식질환'을 인정했고, 살균제 사용으로 인해 '신규 천식'이 생겼다고 보고 구제급여도 지급했다. 이후 지수의 천식 질환이 중증이라는 점도 인정됐다. 재판부 의뢰로 지수의 진료기록을 감정한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과 1차 진료 병원은 “가습기살균제 사용 후 현저히 천식증상이 악화됐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환자 사(私)감정까지 맡긴 옥시

옥시는 그러나 가습기살균제 사용이 천식 질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옥시 측은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에게 지수의 의료기록 감정을 별도로 의뢰했다. 이들이 찾은 인물은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A씨였다.

A씨는 검토 의견서를 세 번이나 재판부에 제출했다. 137쪽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가습기살균제와 천식은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지수의 천식 질환이 심화된 것 또한 살균제와는 무관하다는 의견이다. A씨는 그 근거로 지수의 진료기록 중 천식 치료제 사용 기록을 재구성해 만든 표를 제시했다. 옥시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김앤장도 이 의견서를 토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지수의 소송대리인은 A씨가 작성한 검토 의견서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의료 감정을 위해선 환자가 치료받은 모든 의료기관의 진료기록과 처방 약제를 살펴야 하는데, A씨는 특정 병원(3차 대학병원)의 진료기록만을 토대로 의료기록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성주 의료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옥시 측이 유리한 대응 논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유리한 증거들은 모으고, 불리한 것은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청부 과학'”이라고 비판했다.

지수는 가습기살균제 사용 후 천식 질환이 악화됐다. 지수의 부모는 거동이 불편한 지수를 대신해 3차 대학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를 들고 집 인근 1차 병원(내과 의원)을 찾아 천식 약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A씨는 “가습기살균제 사용 전, 사용 당시, 사용 후를 비교할 수 있는 의료기록은 3차 대학병원 기록뿐”이라며 의원급 진료기록을 배제하고 기록표를 만들었다.

김 변호사는 “전신 스테로이드 사용 여부는 천식 악화 정도를 진단하는 데 사용된다”며 “가습기살균제 노출 이전에는 3차 대학병원에서 단 5일만 전신 스테로이드를 투여받았고, 노출 이후 찾은 1차 병원에선 거의 매일 투여받았는데 이를 자의적으로 제외시키고 상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특정 의료기록 배제한 검토 의견서는 위험"

다른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들의 의견은 어떨까. 한국일보가 자문한 전문의 3명은 A씨의 검토 방법이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임종한 인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특정 기간의 약재 사용, 병력 등이 자의적으로 배제될 수 있기 때문에 의원급 1차 병원이라고 해도 의료감정 과정에선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B교수도 “3차 대학병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1차 병원에 제출했고, 같은 약이 처방된 상황인데 1차 병원을 빼고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고 밝혔다.

소아 환자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한 소아 환자의 경우 대학 병원 대신 가까운 동네 병원을 자주 찾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누락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A씨 "종합적으로 검토해 작성한 것...문제 없어"

지수의 소송대리인은 옥시 측이 A씨를 통해 환자 진료기록에 대한 사(私)감정을 하고, 기업 대응 논리에 유리하게 의료기록을 편집한 점을 문제 삼기도 했다. A씨는 재판부가 허락한 감정 의뢰가 아니라 기업에서 별도로 의료 감정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당사자 동의 없이 의료기록을 들여다볼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옥시 측은 이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옥시 측은 “원고 측 진료기록은 합법적 절차에 따라 확보된 증거 자료”라며 “자문계약을 맺은 자문위원에 해당 기록에 대한 의학적 의견을 구했고 개인정보보호법을 준수해 개인정보를 처리 및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앤장은 “소송 중인 사건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A씨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산하 건강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했고, 안전 보건 분야에서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발언을 해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A씨는 한국일보 통화에서 “의무기록에서 뽑아낼 수 있는 사실들을 거기(제작한 의료기록표)에 다 넣었다. 읽기 좋게 서머리(요약)하는 것도 능력”이라며 “(자문비용은) 영업비밀이라 말할 수 없다. 나는 비싼 사람”이라고 말했다. A씨는 이어진 통화에서 “앞서 말했던 것은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 정식 취재 요청을 하면 답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본보가 보낸 질의서에 “나의 분석 방법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 의무기록 전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의견서를 작성했고, 이 답변 외의 것은 기사화돼선 안 된다”고 답했다.

옥시, 2011년에도 입맛에 맞는 연구용역 의뢰해 활용

옥시 측은 과거에도 가습기살균제 유해성에 대해 '청부 과학적' 연구를 의뢰하고, 이를 활용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2011년 정부가 가습기살균제가 원인 미상 폐 질환의 위험 요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자, 옥시는 서울대 산학협력단에 2억5,000만 원의 연구용역비를 지급하고 별도의 독성 실험을 의뢰했다. 당시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 평가' 연구용역의 책임자는 조명행 서울대 교수였다.

조 교수는 옥시에 불리한 연구 데이터를 일부러 조작하거나 누락해 가습기살균제의 문제점을 축소·은폐한 최종결과 보고서를 써줬다. 조 교수가 내놓은 ‘가습기살균제와 폐 손상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보고서는 옥시 측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쓰였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2018년 “연구자가 기업으로부터 금전을 지급받고 기업 요청에 따라 기업에 불리한 실험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누락한 행위는 연구 부정 행위”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단독] 가습기살균제 '천식' 17세 피해자 "골리앗 옥시 상대 첫 승소 기다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32919470003979

조소진 기자
이성원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