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윤 대통령 도와야 일본에 이익...한일관계 천천히 개선될 것"

입력
2023.03.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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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전망, 일본 전문가 4인 인터뷰]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이달 16일 도쿄에서 회담한 지 29일로 2주째. 양자 정상회담을 위해 한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것은 12년 만이었다. 2018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고 한국 대법원이 판결하고 일본이 보복 조치를 한 이후 한일 관계는 전후 최악이라 불릴 정도로 악화했다.

한국이 양보하는 내용의 강제동원 해결 방안 발표(이달 6일)와 한일 정상회담을 거치며 한일관계는 누그러질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제자리걸음이다. 한국에서 '굴욕 외교'라는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한국의 양보에 화답하는 이른바 '성의 있는 호응 조치'를 전혀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엔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 한일 위안부 피해자 합의 복원 등 민감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 양국 국민 감정이 악화하고 관계 개선 노력이 무산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28일 초등교과서 검정 결과에서 거듭 확인된 일본의 퇴행적 역사관도 시한 폭탄이다.

이에 한국일보는 한일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관계 개선을 위해 양국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할지 등을 일본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한일관계 전문가 그룹을 대표하는 원로인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비교적 중립적 입장에서 미디어를 통해 활발하게 발언하는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기무라 간 고베대 교수, 인권 관점에서 갈등 이슈를 바라보는 소장파 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 준교수 등 4명이 27~29일 사이 전화인터뷰에 응했다.

이들은 “기시다 총리의 ‘성의 있는 호응’을 당장은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한국이 원하는 대로 양국 관계가 흘러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임기가 4년 남은 윤석열 정부의 관계 개선 의지가 큰 데다 중국·북한 리스크를 비롯해 한일이 처한 국제 안보 환경이 엄혹한 만큼, 양국이 상황을 관리하며 천천히 관계 개선을 꾀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①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 해결 전망

한국 정부의 '일본이 아닌 한국 재단의 대위변제' 방식의 강제동원 문제 해결책이 시행될지 여부에 따라 일본의 태도가 갈리고 이에 따라 한일 관계가 좌우될 것이다. 피해자들이 이 방식을 강력 거부하는 것이 변수다.

전문가 4명은 한국 정부가 의지를 갖고 대위변제를 진행해도 조속한 해결은 어렵다고 봤다. 기무라 교수는 "아직 계류돼 있는 피해 보상 소송을 포함해 제3자 변제에 반대하는 당사자의 채권을 포기시키려면 한국에서 특별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여소야대 국회여서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4월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다수당이 돼야 특별법 제정이 가능하므로 논쟁이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만 상황이 더 악화하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오가타 교수는 "피해 당사자들이 반대하는 이번 해결책은 근본적 해법이라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한국 여론의 반발은 해결책 내용에 대한 비토가 아니라 '굴욕 외교'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만큼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미야 교수는 한국 사법부도 판결의 외교적인 영향에 대해 새삼스럽게 인식했을 것"이라고 말해 사법부발 악재가 돌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점쳤다.


② 기시다 총리, '진전된 호응’ 할까

윤석열 정부는 일본이 추가 사과나 강제동원 피고 기업의 출연 등으로 화답할 것을 기대했지만, 기시다 총리는 "(과거사에 대한) 과거 담화를 전체적으로 계승하겠다"고 말한 데 그쳤다. 올해 여름쯤으로 예상되는 기시다 총리의 한국 방문 때 그가 '선물'을 들고 오지 않는다면, 한일관계는 극적으로 개선되기 어렵다.

전문가들의 입장은 한결같이 비관적이었다. 기미야 교수는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로 하여금 빚을 지게 만들었다. 기시다 총리가 다음 방한에서 갚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나 '간 나오토 담화' 등에서 일부를 계승한다는 식으로 좀 더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한국 사법부 판결과 그 효과를 인정하는 언급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코노기 명예교수는 "기시다 총리는 역사 트라우마를 벗지 못한 자민당 보수파의 눈치를 보고 있다"며 "피해자를 위로하는 표현을 하는 정도가 최대치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너무 적극적인 것이 독이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기무라 교수는 추가 진전이 어렵다고 봤다. 그는 "일본 외무성엔 '우리도 한국에 뭔가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윤 대통령이 '나한테 맡기라'고 호언장담하면서 '굳이 줄 필요가 없겠다'는 목소리가 커졌다"고 했다. 오가타 교수도 "일본 정부는 원하는 것을 이미 얻은 상태라서 무리해서 한국에 호응할 동기부여가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③ 후쿠시마 오염수, 위안부 합의 등 추가 변수

일본 언론은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후쿠시마현 수산물 수입금지 해제와 한일 위안부 합의 이행 등 난제의 해결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윤석열 정권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사안들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보도는 일본 보수파를 겨냥한 ‘국내용’이라면서 일본이 한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레이더·초계기 문제에 대해선 "(양국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어) 어느 한쪽의 책임으로 결론내기는 어렵다”(기미야 교수) "서로 유감을 표명하는 정도로 종료할 가능성이 크다"(기무라 교수)는 의견이 제시됐다. 수산물 수입 재개에 대해서도 기무라 교수는 "세계무역기구(WTO) 소송에서 한국에 진 일본 정부가 강하게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맺은 한일 위안부합의 이행과 관련 기미야 교수는 "화해·치유재단을 다시 복원할지 말지는 한국 정부가 판단할 몫이다. 위안부 피해자 소송은 강제동원 소송과 달리 일본 입장에서 남아 있는 법적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과거사 문제는 새로운 폭탄이 될 수 있다. 기무라 교수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사망으로 역사수정주의 흐름이 점차 멈출 가능성도 있다"면서도 "당분간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④ 앞으로 4년간 한일 관계 종합 전망

한일관계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을 요약하자면 "조심스럽지만 낙관적"이라는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로 국제 환경을 꼽았다. 기미야 교수는 "미중 대립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겪으며 한일의 외교 관점이 변했다"며 "한국에서도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좀 더 유지해야 한다'는 야당 논리보다 '미국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윤석열 정부 외교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그런 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늘어나면서 한일관계가 선순환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오코노기 명예교수는 일본이 한국 정부에 힘을 실어줄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일본이 유연하게 대응해 윤석열 정부를 도와주는 것이 일본의 이익인데, 자민당 보수파나 기업이 거부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통해 한미 관계가 더 견고해진다면, 일본도 뒤늦게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더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오가타 교수는 양국 정부가 '65년 체제'를 업그레이드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인권의 관점에서 피해 당사자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논의를 양국이 시작할 때가 됐다"면서 "누가 이기고 지느냐를 따지는 식이 아니라 65년 체제 이후의 패러다임을 고민해야 양국 관계가 진정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최진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