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아편전쟁으로 포문을 연 서구의 동아시아 침탈로 한중일 3국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도 본격화했다. 패전국 청(중국)의 양무운동(1861)과 변법자강운동(1898),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 조선의 갑신정변(1894)과 동학농민운동(1894). 모두 국내외 정세와 개혁주체-이념은 상이했고 결과적으로 메이지유신을 제외한 모든 시도가 실패했지만, 자주권과 근대적 번영이라는 취지는 대동소이했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건 막부 권력의 공백을 채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권력이 별 견제 없이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영주-무사 체제의 번을 해체하고 신분제를 폐지한 메이지 정부는 방대한 불만세력을 해외로 돌렸다. 대만 침략과 류큐(오키나와) 병합, 조선 개항과 식민화.
청의 양무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즉 기존 체제에 서양 무기와 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왕실 중심의 체계적 전략과 지원 없이 지방 관료들이 주도함으로써 국가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채 분열-실패했다. 김윤식 김홍집 등 조선의 온건 개혁파가 추구한 모델이 양무운동이었다면, 김옥균의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으로 꾀한 건 메이지유신 모델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메이지정부와 같은 중앙집권적 동력이 없었고, 개혁 자체에 반발한 보수세력과 청을 업은 막강한 온건개혁파 견제세력이 있었다.
캉유웨이(1858.3.19~1927.3.31) 등이 추진한 변법자강운동은, 당시 황제 광서제를 내세워 입헌군주제를 기치로 삼았던, 양무운동의 분권적 한계를 극복하려던 시도였다. 다만 그들도 어린 황제 배후의 서태후 보수권력과 공화주의 혁명을 추구한 혁명파의 벽을 넘지 못했다. 변법의 이상은 서태후의 반격(무술정변)으로 100일 만에 막을 내렸고, 캉유웨이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개혁의 승자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이듬해 중화민국을 수립한 쑨원 중심의 혁명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