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전환기에 선 한일관계

입력
2023.03.23 18:00
26면

현실적 해결이 불가능한 기존의 한일문제
한국 국력에 맞는 양국 간 새로운 룰 필요
새 관계 성패, 일본의 상응한 태도에 달려


한일 간 문제의 핵심은 알다시피 사과와 보상에 대한 입장 차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의 문구를 들어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이고, 우리는 위안부 강제징용자 등의 개인배상청구권은 국가협정과 별도로 살아있다는 입장이다. 사과 역시 일본은 충분히 했음에도 한국이 끝없이 요구한다는 주장이고, 우리는 실질적 반성조치가 수반되지 않은 만큼 제대로 된 사과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접점 없는 이 해석 차이를 두고 정당성의 우위를 따지는 일은 국제법적으로도 난제다. 양국 어느 쪽도 국제사법재판소의 승소를 확신키 어려워 제소조차 피해온 이유다. 결국 2015년 정부 간 ’위안부 합의‘란 외교수단을 동원했으나 전 정부의 파기와 대법원의 개인배상판결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우리가 원하는 해법이야 일본이 때마다 사과를 거듭하고, 우리 피해국민에 대해 충분히 배상하는 것이다. 일본이 자국민에게 역사적 죄과를 가르치면 더 이상적이다. 그런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국가관계에는 당연히 국력이 기저에 깔린다. 해방 이후 가해자 일본은 언제나 강자, 피해자 한국은 늘 약자 입장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본에 요구하고, 일본은 마지못해 ’시혜‘를 베푸는 식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선 대한국 저자세 외교가 자주 문제가 됐다. 1990년대까지의 고노, 무라야마, 오부치의 담화 선언들이 그것이다. 그마저도 뒤이은 망언들로 훼손됐으나 그조차 2010년 간 나오토의 담화로 끝났다. 일본우익이 발호하고 혐한정서가 일본정치의 기류로 정착되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우위에 선 일본의 여유 있는 자부심과, 상대적 열위였던 우리의 자존심이 맞서는 형국이었다. 이 관계양상이 확실히 달라졌다. 최소한 일본이 만만히 대할 수 없거나 맞상대할 수준으로 우리의 국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불만도 “왜 약소국 한국의 요구에 끌려다니느냐”에서 “왜 한국은 여전히 약소국처럼 행동하느냐”로 바뀌었다. 한국의 높아진 자부심과 일본의 상처 입은 자존심이 충돌하는 반대양상이 나타났다. 한일관계가 근세 이후 처음으로 대전환의 시기를 맞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큰 시각으로 달리 보자면 이번 우리 정부의 ’3자 변제‘ 선언은 이런 거대한 시대조류의 반영일 수 있다(물론 디테일에 서툰 윤 대통령의 거친 스타일까지 수긍하는 건 아니다). “너희가 들어줄 생각 없는 요구에 구차하게 더 매달리지 않겠다. 우리 국민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 대등하고도 정상적인 국가관계를 만들어 나가자. 우린 그만한 자신이 있는 나라가 돼 있다.” 요컨대 이런 메시지다. 처음으로 우리가 한일관계에서 이니셔티브를 쥔 셈이다.

더 당혹스러운 쪽은 일본일 것이다. 늘 한 수 아래로 여겨왔던 한국이 선제적으로 담대한 대국의 행보를 보인 때문이다. “한국이 굽히고 들어왔다” “일본의 완전한 승리” 따위의 일부 우익진영의 환호는 도리어 자존심 상한 안쓰러운 반응으로 읽힌다. (사족을 달자면, 우리 스스로 디테일은 비판하되 ’신 매국노‘ ’계묘국치‘ 따위의 자기모멸적 용어는 삼가기 바란다. 이는 일본우익의 도착적 인식을 돕는 자해에 가깝다. 지금의 우리가 구한말처럼 팔아넘겨지고 침탈당할 나라인가.)

어쨌든 일본의 응당한 태도변화만 남았다. 행여 너무 오래 미적거릴수록 명분을 잃는 쪽은 일본이다. 무엇보다 안보 경제 문화 등 모든 실질분야에서 상대의 협조가 필요한 입장임은 양국이 다를 게 없다. 좋든 싫든 한일관계는 이제 전혀 새로운 룰이 작동하는 전환적 단계로 접어들었다. 일단은 기다리며 지켜볼 일이다.

이준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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