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계 실력자이자 자민당 원로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와 아소 다로 전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을 빈손으로 돌아가게 해선 안 된다"고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 조언했던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기시다 총리는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기대한 '성의 있는 호응 조치'를 당장은 하지 않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윤 대통령은 도쿄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사실상 빈손으로 귀국했다.
일본 정계에 인맥이 넓은 한국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16일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통 큰 양보’를 하고도 양국 간에 '기브 앤드 테이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기시다 총리의 '계산된 고집' 때문이었다.
정상회담 열흘 전에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제3자 변제 방식의 해결책을 발표했다. 윤 대통령은 "추후에도 구상권이 행사되지 않는다"고 말해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 기시다 총리는 그러나 화답하지 않았다.
아소 전 총리는 지난해 11월 한국을 방문해 윤 대통령의 한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확인하고 기시다 총리에게 이를 전달했고, 모리 전 총리는 의원 시절 일한의원연맹 회장을 지냈다. 두 전직 총리들의 권고에도 기시다 총리가 강경하게 나온 것은 그가 당분간은 한일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시키지 않겠다고 작정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국 정부에 대한 그의 '불신'이 여전한 데다 4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층의 여론 악화를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의 한 한일관계 전문가는 24일 “기시다 총리가 아베 신조 전 총리처럼 자민당을 휘어잡고 있다면 다른 판단을 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러나 당내 입지가 약해 여론을 의식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모리, 아소 전 총리가 '일본도 한국에 양보하라'는 취지의 조언을 한 것 자체가 일본 보수 진영의 기류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지난해까지 자민당에선 한국을 언급하는 것을 꺼릴 정도로 반감이 컸다. 이에 한국 여권에선 두 전직 총리가 유화적 조언을 했다는 사실을 기시다 총리가 조만간 모종의 태도 변화를 보일 수 있다는 시그널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월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의 초청을 받아 참석한 후가 한일 관계의 변곡점이 될 수 있다고 여권은 기대하고 있다.